증평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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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행 ( 辛景行 : 1547∼1618 )

조선 중기의 공신으로, 자는 백도 ( 伯道 ) , 호는 조은 ( 釣隱 ) 이며, 본관은 영산 ( 靈山 ) 이다. 고려 때 정당문학 ( 政堂文學 ) 을 지낸 덕재 ( 德齋 ) 신장 ( 辛藏 ) 의 8대손이다. 청 안 문방리에서 명종2년 ( 1547 ) 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봉정대부 ( 奉正大夫 ) 로 강이습독 관 ( 講肄習讀官 ) 을 지낸 영산군 ( 靈山君 ) 신질 ( 辛 ) 이다. 『만력원년계유이월이십사일사마방목 ( 萬曆元年癸酉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 ) 』에 의하면, 선조 6년 ( 1573 ) 식년시 진사에 2등 28인으로 합격하고, 1577년 별시 ( 別試 )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 司諫院正言 ) 을 거쳐 병조좌랑 ( 兵曹佐郞 ) 이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 義兵 ) 을 일으켜 호서지방에서 크게 활약하고, 1592년에 한산군 수 ( 韓山郡守 ) 가 됐다. 선조 29년 ( 1596 ) 에는 이몽학 ( 李夢鶴 ) 이 반란을 일으키자 홍 주목사 ( 洪州牧使 ) 홍가신 ( 洪可臣 ) 의 종사관 ( 從事官 ) 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정 유재란 때는 공주목사 ( 公州牧使 ) 로서 성 ( 城 ) 을 긴급하게 수축했고, 전쟁이 끝난 후인 선조 33년 ( 1600 ) 에는 서흥목사 ( 瑞興府使 ) 를 거쳐 경관직 ( 京官職 ) 으로 들어가 군 자감정 ( 軍資監正 ) 을 지내고 다시 지방관직으로 나가 홍주목사 ( 洪州牧使 ) 를 역임했는 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 ( 淸白吏 ) 에 녹선 ( 錄選 ) 됐다. 선조 37년 ( 1604 ) 장흥부사 ( 長興府使 ) 에 오르고, 앞서 이몽학 ( 李夢鶴 ) 의 반란을 평 정한 공으로 정난공신 ( 靖難功臣 ) 3등이 되고 영성군 ( 靈城君 ) 에 봉해졌으며, 지방관직으 로 공주목사 ( 公州牧使 ) ·홍주목사 ( 洪州牧使 ) ·장흥부사 ( 長興府使 ) 등을 역임했고, 1605년에는 병조참의 ( 兵曹參議 ) 를 거쳐 동부승지 ( 同副承旨 ) 에 올랐다. 1606년에는 남 원부사 ( 南原府使 ) 를 지냈다. 1608년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 ( 忠淸道兵馬節度使 ) 로 나갔 다. 광해군 때에는 모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청안에 조은정 ( 釣隱亭 ) 을 세우고 서경 ( 西坰 ) 유근 ( 柳根 ) , 월정 ( 月汀 ) 윤근수 ( 尹根壽 ) 등과 더불어 유유자적했다. 광해군 10 년 ( 1618 ) 1월 7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이 72세이다. 자헌대부 ( 資憲大夫 ) 예조판서 ( 禮曺判書 ) 에 추증 ( 追贈 ) 됐으며, 시호 ( 諡號 ) 는 충익 ( 忠翼 ) 이다. 청안면 문방리의 군 방서원 ( 群芳書院 ) 에 제향됐다. 묘소는 증평읍 남차리 양지말에 있으며 저서로는『조은집 ( 釣隱集 ) 』이 있다. 참고문헌 : 증평군지 제4편 성씨와 인물

신경행 묘소(辛景行 墓所)
소재지 증평군 남차리(숯고개) 산3-1
규모 봉분 크기 가로 5m, 세로 5m, 높이 2m
조성시기 조선시대(1642년 경)
지정번호 충청북도지정 기념물 제32호
(2004. 9. 17 지정)

증평읍사무소에서 증천교에 이르러 이곳에서 청원군 초정 방면으로 540번 지방도를 따라 3.3㎞ 쯤 가서 죽리초등학교 직전 덕상교에서 공수부대를 지나 2㎞의 거리에 남차1리 마을 맞은편 산기슭에 사당과 묘소가 있다. 이 묘소는 봉분의 크기가 가로 5m, 세로 5m, 높이 2m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 묘비, 망부석, 문관석이 있는데 동자석은 2005년에 분실돼 새로 조각해 설치했다. 묘소 아래에는 1969년 10월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묘소 입구 길가에는 2005년 4월에 다시 신도비가 건립됐다. 신경행은 조선 선조 6년(1573) 진사시에 합격했고 4년 뒤 별시 문과에 병과 9인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그 공으로 선조 26년(1593)에 한산군수가 됐다. 선조 29년(1596)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 3등에 책록돼 영성군에 봉해졌다. 그 뒤 공주목사, 서흥부사, 장흥부사, 병조참의, 동부승지, 남원부사를 지냈고 선조 41년(1608)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됐다. 신경행은 광해군 때 맹롱(盲聾)으로 퇴관 귀향해 지금의 증평나들목(IC) 부근 여암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반계(磻溪) 위에 조은정을 짓고 만년에 이신양성했다고 한다. 또 월은동의 연모사에 운수정을 짓고 이곳에서도 낚시를 즐기며 수양을 하다 77세로 숨졌다. 신경행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숙종 14년(1688)에 청안현 칠보산 아래 군방동에 사당을 건립, 영조 36년(1760)에 군방서원으로 승격됐고, 신경행과 그의 8대조인 고려시대 태학자 덕재 신장을 추봉, 병향하고 있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철거하고 원 위치에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영당에 신경행 유상(遺傷)과 청난공신책록 등 유품이 보존되고 있다. 또 1922년에는 그의 후손들이 수현(壽峴)에 청연사를 건립해 해마다 음력 정월 7일 향사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