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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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장래 희망과 꿈이 가득한 마을

초중리(楚中里)

[ 연혁 ]

초중리(楚中里)는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6년, 1760년 이후)에 보이는 청주목(淸州牧)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초성리(楚珹里)가 변한 마을이다. 이 책에 초성리는 “자관문동북거사십리편호오십일호남칠십팔구여오십구구(自關門東北踞四十里編戶五十一戶男七十八口女五十九口)”로 기록되어 있다. 즉 “청주 관문에서 동북쪽으로 40리이고, 51호에 남자 78명ㆍ여자 59명”이라는 뜻이다. 초중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는 청주군(淸州郡) 산외이면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청주군 산외이면 37개리 가운데 초중리란 이름이 보인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주군(淸州郡) 북이면(北二面)은 32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초중리는 기존의 초중리(楚中里)에 청주군 산외이면의 장촌리(墻村里)ㆍ금대리(琴臺里)ㆍ외장리(外墻里)ㆍ송정리(松亭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초중리라 했다.광복 이후에도 초중리는 줄곧 청원군(淸原郡) 북이면에 속했다가, 1973년 7월 1일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괴산군 증평읍에 편입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초중리는 장평지소(莊坪支所) 관할이었다. 2002년 1월 2일에 주민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지소의 관할구역을 변경할 때, 초중리는 장평지소에서 증천지소(曾川支所)로 바뀌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초중리가 되었다.

[ 유래 ]

초중리는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6년, 1760년 이후)의 초성리(楚城里)에서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성(楚城)이 지명 명명과 관련성이 깊은 ‘땔나무 초(樵)’의 ‘초성(樵城)’에서 변한 표기라면, ‘땔나무가 많은, 즉 잡목이 우거진 마을’ 정도로 해석된다. 초중리는 청원군 북이면과 접해 있는 마을이다. 토지구획 정리 지구에 한라비발디아파트[540가구]ㆍ일진뜨리에아파트[220가구]ㆍ파라디아2차아파트[112가구] 등이 들어섰다. 또 삼보초등학교ㆍ증평여자중학교ㆍ증평정보고등학교 등 3개 학교와 충북인삼농협이 들어서 있고 현재 농협중앙회 고려인삼 증평공장이 있다. 2010년 5월 현재 1,692세대에 4,316명이 거주하고 있다.

  • 초중1리(楚中一里) : 신초중(新楚中) : 초중1리는 전에는 청원군 북이면 지역이었다. 1973년에 괴산군 증평읍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현재의 초중1리 지역을 ‘신초중’으로 불렀다. ‘신초중’은 ‘신’과 ‘초중’으로 나뉘고, ‘새로 생긴 초중리’로 풀이된다. 초중리는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청주군(淸州郡)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초중리(楚中里)’로 불리던 곳이다.금방아도랑(金-) : 초중1리ㆍ신동리ㆍ창동리 경계 지점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250m 정도 흘러 보강천에 합류하는 도랑이다. 현재는 복개되어 도랑을 확인할 수는 없다. ‘금방아도랑’은 ‘금방아’와 ‘도랑’으로 나뉘며, ‘금방아가 있는 도랑’으로 풀이된다.
  • 초중2리(楚中二里) : ㆍ정안(定安)/증안 : ‘신초중’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6년, 1760년 이후)에 ‘정안리(定安里)’가 보인다. ‘정안리’는 “자관문동북거사십리편호사십구호남육십육구여오십육구(自關門東北踞四十里編戶四十九戶男六十六口女五十六口)”로 기록되어 있다. 즉 “청주 관문에서 동북쪽으로 40리이고, 49호에 남자 66명ㆍ여자 56명”이라는 뜻이다. 또한 『청주목지도』(1872)에 청주목 산외이면 10개리 가운데 ‘정안(定安)’이란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정안’은 청원군 북이면 금대1리 ‘금대’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다. 그리고 ‘정안’과 이어진 골짜기를 북이면 금대1리 ‘금대’에서는 ‘증악골’로 부른다. 이 ‘증악골’은 ‘증안골’의 변화형으로, 다시 ‘증안골’은 ‘정안골’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정안’은 ‘점안’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점안’의 ‘점’은 ‘점(店)’으로, ‘토기나 철기를 만드는 곳’을 뜻한다. ‘안’은 ‘내[內]’를 뜻한다. 따라서 ‘점안’은 ‘옹기점ㆍ기와점ㆍ철기점의 안쪽’을 가리킨다. 전국적으로 ‘점안골’ㆍ‘점안들’ㆍ‘점안산’, ‘정안고개’ㆍ‘정안골’ㆍ‘정안들’ㆍ‘장안보’ㆍ‘정안터’, ‘증안골’ㆍ‘증안이골’ 등과 같이 ‘점안’과 이것의 변화형 ‘정안’ㆍ‘증안’이 붙은 지명이 여럿 발견된다. ㆍ가장골/가좌골 : ‘정안’ 동쪽에 있는 마을로, 삼보초등학교 뒤편에 있다. 지명에서 ‘가장골’은 ‘가재골’ㆍ‘가자골’ㆍ‘가좌골’ㆍ‘갓골’ㆍ‘가골’ㆍ‘각골’ㆍ‘가세골’ㆍ‘가좌골’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 중 ‘가장골’이 원형에 가깝다. ‘가장골’은 ‘가장’과 ‘골’로 나뉘고, ‘가장’은 ‘가장자리’를 뜻한다. 따라서 ‘가장골’은 ‘가장자리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실제로 초중리의 경우 대한제국 시대 이전에 청주목과 청안현의 경계에 해당하며, 청주 땅에서 보면 북쪽 가장자리에 해당한다. 둥구나무 : 정안경로당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가리킨다. ‘둥구나무’는 ‘크고 오래된 정자나무’를 뜻한다.박샘 : ‘정안들’ 안에 있는 샘이다. ‘정안’에 5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현재도 마을의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다. ‘박샘’은 ‘박’과 ‘샘’으로 나뉜다. 여기서 ‘박’은 ‘바가지’를 뜻하니, ‘박샘’은 ‘바가지로 뜨는 샘’으로 풀이된다. 삼발랭이산[三-山] : 정안 동쪽 ‘서낭골’ 부근에 있는, 높이 189.7m의 산이다. ‘삼발랭이산’은 ‘삼발랑’에 접미사 ‘이’가 붙은 ‘삼바랑이’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다. ‘발랑’이나 ‘바랑’은 ‘벼랑’의 방언형으니, ‘삼발랑’이나 ‘삼발랭이’는 ‘세 개의 벼랑이 있는 곳’을 뜻한다. 따라서 ‘삼발랭이산’은 ‘세 개의 벼랑이 있는 산’으로 풀이된다. 서낭골 : ‘정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청원군 북이면 금대2리 ‘담안’과 경계를 이룬다. ‘서낭골’은 ‘서낭’과 ‘골’로 나뉜다. 따라서 ‘서낭골’은 ‘서낭당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서낭당은 서낭에게 제사하기 위한 제단으로, 지방에 따라 성황당(城隍堂)ㆍ할미당(-堂: 전남)ㆍ천황당(天隍堂: 경북)ㆍ국사당(國師堂: 평안)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의 서낭당이 중국의 성황당(城隍堂)에서 유래하였다 하나 분명치 않으며 고유한 사상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성황(城隍)은 성지(城池)의 신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나라의 서낭과 그 소리가 비슷한 까닭에 유학자들이 잘못 써 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낭은 ‘산왕(山王)’에서 나온 말로, 토지와 마을을 지켜주는 신이다. 따라서 서낭당은 서낭의 봉안처인 동시에 거소가 되며, 서낭 신앙은 일정한 장소에서의 제의(祭儀)를 통해 인간적 소망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낭의 본질은 산신(山神)과 천신(天神)의 복합체로 보아진다(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 1994: 812). 서낭당은 보통 신수(神樹)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형태이거나 신수에 당집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또 서낭당은 고갯마루ㆍ한길 옆ㆍ마을 입구 등에 위치하며, 몽고(蒙古)의 영향을 받아 흰 종이나 울긋불긋한 헝겊이 걸리기도 한다. 때로는 흙이나 무쇠로 만든 조그만 말[馬]을 모셔 놓은 서낭도 있는데, 이를 ‘말서낭’이라 한다. 『청주읍지(淸州邑誌)』「산천조(山川條)」에 “인경산… 상유동마자마이진산령(引頸山… 上有銅馬磁馬以鎭山靈)”이라는 기록이 있다. 즉 “(청주 동쪽 30리의) 인경산… 꼭대기에는 구리와 도자기로 만든 말이 있는데, 이는 산령을 누르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 표현이 바로 말서낭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서낭에는 하나의 설화가 결부되어 있다. 옛날 중국 주(周)나라 때 강태공(姜太公)이 때를 기다리느라 낚시질만 하니 그 부인 마 씨(馬氏)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훗날 강태공이 때를 만나 크게 출세하니 마 씨가 돌아와 같이 살기를 청했다. 강태공이 그릇에 담긴 물을 엎지르고는, “이 물을 다시 담으면 같이 살겠다.”고 하자 마 씨가 불가능의 고 빌며 애원했다. 강태공이 다시 빈 사발을 주며 “이 사발에 침을 뱉어 채우면 같이 살겠다.”고 하니 마 씨가 침을 뱉다가 죽었다. 이에 사람들은 돌을 던져 마 씨의 무덤을 만드니, 그것이 서낭당이 되었다. 서낭당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침을 뱉고 가야 하는데, 이는 침을 한 사발 못 채우고 죽은 마 씨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이 설화는 단지 강태공 부인의 성씨(姓氏)가 마(馬)이므로, 이것이 ‘말’과 같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통행인이 돌을 주워 돌무더기 위에 던지거나 침을 뱉는 행위는 나그네 길의 안전을 위해 도로에 배회하는 악령(惡靈)의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다. 서낭제를 지내는 곳에서는 대개 정월 보름에 행한다. 생기 복덕(生氣福德)에 맞는 제관(祭官)과 축관(祝官)을 뽑으면, 그들은 대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며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면서 3일간 근신한다. 그리고 제삿날 밤 달이 떠올 무렵 서낭당에 가서 제물을 차려 놓고 마을을 대표하여 유교식으로 제사한다(청원군지편찬위원회, 1990: 1035~1036). 수살매기(水殺-) : ‘정안’의 ‘정안마을녹색체험관’ 부근에 있는 나무이다. ‘수살매기’는 ‘수살막이’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다. ‘수살막이’는 ‘수살’ㆍ‘살막이’ㆍ‘수살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시골 동네 어귀에 서 있는 돌이나 나무’를 말한다. 동네를 수호하는 신성한 것으로, 전염병이 유행할 때 새끼줄을 쳐서 모시며 또한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환자의 옷을 걸어 놓기도 한다. 이는 흔히 ‘살방’ㆍ‘수살방’ㆍ‘수살목’ 등의 뜻을 가진 풍수지리상의 비보(裨補)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미방앗간 : ‘농협중앙회고려인삼증평공장’ 옆에 있던 방앗간이다. ‘시미방앗간’은 ‘시미’와 ‘방앗간’으로 나뉜다. 전국적으로 ‘시미’는 비교적 흔한 지명인데, 몇 가지 어원이 관련되어 있다. 첫째는 ‘시미’‘시미소목’의 변화형으로 보는 견해이다. ‘시미기’와 ‘소목’ㆍ‘우항(牛項)’이 함께 사용되는 예가 있다. 둘째는 ‘시미’를 ‘시묘(侍墓)’의 변화형으로 보는 견해이다. ‘시미리’와 ‘시묘골’ㆍ‘시묘곡’이 함께 사용되는 예가 있다. 셋째는 ‘시밋’으로 쓰여 ‘시밑’으로 보는 견해이다. ‘시밑’은 ‘수밑(藪-)’의 변화형으로, ‘숲 아래’를 뜻한다. ‘시밑’과 ‘수밑’이 함께 쓰이는 예가 있다. 이상의 설명을 따르면, ‘시미방앗간’은 ‘소의 목처럼 생긴 들에 있는 방앗간’ㆍ‘시묘살이를 했던 들에 있는 방앗간’으로 풀이된다. 또는 ‘숲 아래에 있는 들에 있는 방앗간’으로도 풀이된다. 양촌골(陽村-) : ‘(주)증평택시’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양촌골’과 ‘퉁퉁골’은 ‘가장골제’를 사이에 두고 나뉘었다. 또 충북선으로 인해 동서로 구분된다. ‘양촌골’은 ‘양촌’과 ‘골’로 나뉜다. ‘양촌’은 ‘양지쪽에 있는 마을’을 뜻하니, ‘양촌골’은 ‘양지쪽 마을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절골 : ‘삼발랭이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청원군 북이면 금대1리와 경계를 이룬다. ‘절골’은 ‘절’과 ‘골’로 나뉘며, ‘절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절골’은 지명에서 흔히 ‘젓골’이나 ‘적골’로도 나타난다. ‘절골’에 사이시옷이 개재하여 ‘젌골’이 되고, ‘젌골’에서 ‘ㄹ’이 탈락하면 ‘젓골’이 된다. 다시 ‘젓골’이 미파화에 의해 ‘젇골’이 되고, ‘젇골’이 연구개음화에 의해 ‘적골’이 될 수 있다. 즉 ‘절골>젌골>젓골>젇골>적골>’의 변화 과정을 상정할 수 있다. 최초의 어형 ‘절골’이나 이에서 변한 ‘젓골’ㆍ‘적골’은 전국적으로 매우 흔한 지명인데, 대부분 ‘절이 있는 골짜기’란 뜻을 갖고 있다. 정안고개 : ‘정안’ 북쪽에 있는 고개로, ‘정안’에서 ‘신초중’으로 가는 고개이다. 현재는 포장도로가 되었다. ‘정안고개’는 ‘정안’과 ‘고개’로 나뉘며, ‘정안에 있는 고개’를 뜻한다. 정안골 : ‘정안’에서 청원군 북이면 금대2리 ‘담안’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골짜기이다. ‘정안골’은 ‘정안’과 ‘골’로 나뉘며, ‘정안에 있는 골짜기’를 뜻한다.정안들/증안들 : ‘정안’ 서쪽에 있는 들이다. ‘농협중앙회고려인삼증평공장’에서 청주 방면에 있는 들이다. ‘정안들’은 ‘정안’과 ‘들’로 나뉘며, ‘정안에 있는 들’을 뜻한다. 달리 ‘증안들’로도 불리는데, 그 뜻은 ‘정안들’과 같다.증안골방죽 : ‘정안’ 남쪽의 ‘무등산광장’[가든] 앞에 있는 방죽이다. ‘증안골방죽’은 ‘증안’과 ‘방죽’으로 나뉘며, ‘증안[정안]에 있는 방죽’을 뜻한다. 현재도 남아 있다.참샘 : ‘증안골방죽’ 옆에 있는 샘이다. 현재도 남아 있어 약수로 이용된다. ‘참샘’은 ‘찬샘’의 변화형이다. ‘찬샘’은 ‘찬 물이 솟는 샘’을 뜻한다. 청주나들이(淸州-) : 현재 ‘농협하나로마트’ 부근에서 청주 방면으로 가는 증평읍의 끝까지를 말한다. ‘청주나들이’는 ‘청주’와 ‘나들이’로, ‘나들이’는 다시 ‘나들’과 접미사 ‘이’로 나뉜다. ‘나들’은 ‘나고 들다’의 어간이니, ‘나들이’는 ‘특정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길목’이란 뜻이다. 따라서 ‘청주나들이’는 ‘청주 방면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길목’으로 풀이된다. 초중재(楚中-) : 증평 시가지에서 ‘정안’으로 가면서, 충북선 철로 넘어가기 전에 있는 고개이다. 현재는 포장도로가 되었다. ‘초중재’는 ‘초중’과 ‘재’로 나뉘며, ‘초중리[정안]로 가는 고개’로 풀이된다. 퉁퉁골 : ‘양촌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양촌골’과 ‘퉁퉁골’은 ‘가장골제’를 사이에 두고 나뉘었다. 또한 충북선으로 인해 동서로 나뉘었다. ‘퉁퉁골’은 ‘퉁퉁’과 ‘골’로 나뉜다. ‘퉁퉁’은 부사로서, ‘큰 북이나 속이 빈 나무를 잇따라 두드려 울리는 소리’를 뜻한다. 이 골짜기에서 ‘퉁퉁’ 소리가 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퉁퉁이방죽 : ‘가장골’에 있는 방죽이다. 현재도 남아 있다. ‘퉁퉁이방죽’은 ‘퉁퉁골’에 기대어 붙은 이름이다.
  • 초중3리(楚中三里) : ‘정안’ 북쪽에 있으며, 파라디아2차아파트와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 초중4리(楚中四里) : 초중3리 남쪽에 있으며, 최근에 택지로 개발되어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 초중5리(楚中五里) : 초중3리 남쪽에 있으며, 최근에 택지로 개발되어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노르이마들 : ‘상들’ 북쪽에 붙어 있는 들이다. 현재는 택지로 개발되어 주택이 들어서 있다. ‘노르이마들’은 ‘노르이마’와 ‘들’로, ‘노르이마’는 다시 ‘노르’와 ‘이마’로 나뉜다. 여기서 ‘노르’는 ‘노루[獐]’의 변화형으로, ‘노르이마들’은 ‘노루 이마 크기의, 규모가 작은 들’을 뜻한다. 비링이들/동냥들 : 초중1리와 초중3리 사이에 있던 들로, 보강천에 닿아 있다. 현재는 택지로 개발되어 주택이 들어서 있다. ‘비링이들’은 ‘비링이’와 ‘들’로 나뉜다. ‘비링이’는 ‘비렁이’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비렁이’는 ‘비렁뱅이’의 방언으로, ‘거지를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비링이들’은 ‘비렁뱅이들’, 즉 ‘비렁뱅이가 될 만큼 소출이 적은 들’로 풀이된다. 지도에는 ‘동령들’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동냥들’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냥들’은 ‘비링이들’과 마찬가지로, ‘비렁뱅이가 될 만큼 소출이 적은 들’을 뜻한다. 그러나 ‘비렁이’를 ‘벼랑’의 중세국어인 ‘비레’와 관련시킬 수도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비렁이’가 ‘벼랑’의 방언형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링이들’은 ‘비렁이들’ 즉, ‘벼랑으로 되어 있는 들’로 풀이된다. 이 들은 물이 귀해서 땅이 몹시 척박하다. 물이 귀하다면 높은 곳일 수 있다. 그렇다면 후자의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들(上-) : ‘동령들’ 북쪽에 있던 들로, 보강천에 닿아 있다. 현재는 택지로 개발되어 주택이 들어서 있다. ‘상들’은 ‘상’과 ‘들’로 나뉘며, ‘동령들 위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 초중6리(楚中六里) : 초중3리 남쪽에 있으며, 최근에 택지로 개발되어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 초중7리(楚中七里) : 초중3리 남쪽에 있으며, 최근에 택지로 개발되어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 초중8리(楚中八里) : 뜨리에아파트단지이다.
  • 초중9리(楚中九里) : 한라비발디아파트단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