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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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두타산과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살아가는 마을

연탄리 (連灘里)

[ 연혁 ]

연탄리(連灘里)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연탄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연천리(連川里)ㆍ연신리(連新里)ㆍ연산리(連山里)ㆍ사읍사리(沙邑沙里)ㆍ선원리(仙院里)ㆍ금곡리(金谷里)ㆍ반탄리(磻灘里) 등 7개리이다. 그 뒤 연탄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근서면(近西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九譯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연신리(連新里)와 연산리(連山里) 및 연천리(連川里)는 연신리(連新里)ㆍ연천리(連川里)로 합쳐졌으며, 반탄리(磻灘里)는 반탄리(潘灘里)로 변경됐다. 또한 선원리(仙院里)와 사읍사리(沙邑沙里)가 없어지고 탑선리(塔仙里)와 사곡리(沙谷里)가 새로 생겼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연탄리는 근서면 연천리(連川里)ㆍ연신리(連新里)ㆍ탑선리(塔仙里)ㆍ금곡리(金谷里)ㆍ반탄리(潘灘里)ㆍ사곡리(沙谷里) 일부와 청주군 산외이면(山外二面)의 금대리(琴臺里) 일부와 같은 청주군 북강내이면(北江內二面)의 금헌리(金軒里)를 병합하여 만들었다.12) 그러나 ‘금헌리(金軒里)’는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6년, 1760년 이후)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九譯名稱一覽)』(1912)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청주군 북강내이면에 마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여지도서』 이전에 부근 마을에 통폐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이때 연신리와 반탄리의 이름을 따서 연탄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광복 이후 1949년 8월 13일에 대통령령 제156호에 의하여 증평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괴산군(槐山郡) 증평읍 연탄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연탄리는 장평지소(莊坪支所) 관할이었다. 2002년 1월 2일에 주민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지소의 관할구역을 변경할 때, 초중리는 장평지소에서 증천지소(曾川支所)로 바뀌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연탄리가 되었다.

[ 유래 ]

연탄리는 1914년에 연신리와 반탄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連新里/벌말’과 ‘潘灘里/반여울’이 따로 기록되어 있다. 연탄리는 증평읍사무소에서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왕기봉(王起峰)과 국사봉의 기슭에 있다. 송산리ㆍ초중리와 함께 진천군 초평면과 접해 있는데, 1955년 6월 22일에 강원도 양구에서 이전해 온 육군 37사단 사령부가 있다. 연탄리에서 반탄교를 지나 진천군(鎭川郡) 초평면으로 넘나들던 고갯마루에는 성황당이 있었으며, 성황당 아래쪽 골짜기에는 도적들의 소굴이 있어 한 둘이 지나다니는 것을 피했다고 한다. 그리고 연탄리와 진천군(鎭川郡) 초평면(草坪面) 은암리 사이에는 장군대좌(將軍大坐) 터, 천석발복(千石發福) 터 등의 풍수설에 의한 길지들이 있어 지사(地師)들이 이 일대를 답사하기도 했다. 현재 증평문화회관ㆍ증평종합스포츠센터ㆍ증평국민체육센터실내수영장 등이 들어서 있다. 2010년 5월 현재 400세대에 874명이 거주하고 있다.

  • 연탄1리(連灘一里) : 벌말/평촌(坪村)/연신(連新) : ‘벌말’은 연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호구총수』(정조 13년, 1789)에는 ‘연신리(連新里)’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연신(連新)’으로 불리던 곳이다. ‘벌말’은 ‘벌’과 ‘말’로 나뉘는데 ‘벌’은 ‘벌판’을, ‘말’은 ‘마을’을 뜻한다. 따라서 ‘벌말’은 ‘벌판에 형성된 마을’로 해석된다. ‘평촌’은 ‘벌말’을 한자로 표기한 지명으로, 그 뜻은 ‘벌말’과 같다. ‘연신’은 ‘연천리 밖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육군 37사단과 담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고, 돼지 축사가 밀집해 있다. 경로당을 중심으로 위쪽은 ‘윗말’, 아래쪽은 ‘아랫말’이라 한다.ㆍ연천(連川) : ‘벌말’ 북쪽, ‘두타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정조 13년, 1789)에는 ‘연천리(連川里)’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연천(連川)’으로 불리던 곳이다. ‘연천’은 한자어 지명으로, ‘물이 끊임없이 줄기차게 흐르는 시내’가 앞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ㆍ신촌(新村) : ‘벌말’과 ‘연천’ 사이에 있는 마을로, ‘벌말’과 거의 붙어 있다. ‘신촌’은 ‘새로 생긴 마을’로 풀이된다. 가려벌들/갈벌들 : ‘벌말’에서 북동쪽으로 송산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들이다. ‘가려벌들’은 ‘가려벌’과 ‘들’로, ‘가려벌’은 다시 ‘가려’와 ‘벌’로 나뉜다. 여기서 ‘가려’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지명에 흔히 붙는 ‘가래’와 관련된 듯하다. 지명에서 ‘가래’는 ‘갈’ 또는 ‘가락’으로도 보이는데, 한자어로는 ‘가래(加來)’ㆍ‘갈(葛)’ㆍ‘가락(佳樂)’과 대응된다. 그 중에서 ‘갈(葛)’의 출현 빈도가 가장 높다. ‘가래’는 중세국어 ‘가?’ㆍ‘가?’과 관련된다. ‘가?’는 일찍부터 지명에 나타나니, 『삼국사기』권 34의 고대 지명 ‘가라(加羅)’ㆍ‘가락(嘉洛)’ㆍ‘가야(加耶, 伽倻)’ㆍ‘가리(加利)’ 등이 그 예이다. 여기서 ‘加’ㆍ‘嘉’ㆍ‘伽’ 등은 모두 음차(音借)에 의해 ‘가’로 읽히며, ‘羅’ㆍ‘洛’ㆍ‘耶(倻)’?‘利’ 또한 음차(音借)에 의해 ‘?’로 읽혀 ‘갈라짐[分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려벌들’은 ‘갈라지는 벌판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달리 ‘갈벌들’로도 불리는데, 그 뜻은 ‘가려벌들’과 같다.갈벌저수지(-貯水池) : ‘갈벌들’ 위에 있는 저수지이다. ‘갈벌저수지’는 ‘갈벌들’에 농업용수를 대 주기에 붙은 이름이다. 미호천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어, 약 20년 전에 매립되었다.궁골 : ‘연천저수지’ 북쪽, ‘전지골’ 왼쪽[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궁골’은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궁골’을 ‘굼골’의 연구개음화 어형으로 보고, ‘굼’을 ‘?’과 관련시킨다. ‘?’은 상대(上代)의 신앙ㆍ정신면과 관련되는 바, ‘신(神)’의 뜻을 갖는다. 그리고 이 ‘?’은 한자로 표기될 때, 음차표기로는 ‘금(金)’ㆍ‘금(錦)’ㆍ‘금(琴)’ㆍ‘감(甘)’ㆍ‘검(檢)’ 등이 이용되고, 훈차표기로는 ‘부(釜)’ㆍ‘현(玄)’ㆍ‘정(丁)’ㆍ‘흑(黑)’ㆍ‘탄(炭)’ 등이 이용된다. 이런 ‘?’계 지명은 ‘加莫洞 가막골<龍飛御天歌 1: 39>’에서와 같이 일찍이 『용비어천가』에도 보인다. 현대 지명에 나타나는 ‘?’ 계 지명은, 가장 흔한 모습이 ‘?>감’에 조음소 ‘아’가 개재된 ‘가마’인데, 때로는 ‘감’ㆍ‘검’ㆍ‘금’ㆍ‘굼’ㆍ‘가매’ㆍ‘고마’ㆍ‘가미’ㆍ‘가무’ㆍ‘개마’ㆍ‘개매’ 등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들은 ‘신(神)’이나, 여기서 발전한 ‘크다[大]’를 뜻하게 된다. 이상의 설명에 따르면, ‘궁골’은 ‘큰 골짜기’로 풀이된다. 다른 하나는 ‘궁골’을 ‘굼골’의 변화형으로 보는 대신, 직접 ‘궁골’로 본다. 이때는 한자 ‘弓’으로 보아, ‘궁골’을 ‘지형이 활처럼 휘어진 골짜기’로 풀이된다.대골 : ‘궁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대골’은 ‘대’와 ‘골’로 나뉜다. 여기서 ‘대’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대나무’나 ‘크다[大]’와 관련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골’은 ‘대나무가 많은 골짜기’나 ‘큰 골짜기’로 풀이된다. 동녘골 : ‘벌말’에서 ‘연천저수지’를 지나 두타산 방면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통신탑 바로 아래쪽에 있으며, 골짜기가 길다. ‘동녘골’은 ‘동녘’과 ‘골’로 나뉘며, ‘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뜻한다.바랑골 : ‘궁골’ 왼쪽에 있다. 전국에 ‘바랑골’은 매우 많다. 그런데 ‘바랑’은 몇 가지로 다르게 해석된다. 첫째는 ‘바랑’을 ‘중이 등에 지고 다니는 자루 같은 주머니’로 보아, ‘바랑처럼 생긴 골짜기’로 풀이한다. 둘째는 ‘바랑’을 ‘바른’의 변화형으로 보아, ‘지형이 바른 골짜기’로 풀이한다. 셋째는 ‘바랑’을 ‘바람[風]’의 변화형으로 보아, ‘바람이 센 골짜기’로 풀이한다. 넷째는 ‘벼랑’으로 보아, ‘벼랑으로 된 골짜기’로 풀이한다. 이 중 특히 넷째 풀이에 관점을 맞춰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지명에서 ‘벼랑’은 매우 다양하게 실현된다. ㉠ ‘바람’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람고지’ㆍ‘바람골’ㆍ‘바람들’ㆍ‘바람말’ㆍ‘바람모팅이’ㆍ‘바람바우’ㆍ‘바람실’ㆍ‘바람재’ 등이 그 예이다. ㉡ ‘바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랑골’ㆍ‘바랑끝’ㆍ‘바랑날’ㆍ‘바랑들’ㆍ‘바랑말’ㆍ‘바랑메’ㆍ‘바랑바구’ㆍ‘바랑배미’ 등이 그 예이다. ㉢ ‘벼루’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루고개’ㆍ‘벼루들’ㆍ‘벼루말’ㆍ‘벼루모탱이’ㆍ‘벼루배미’ㆍ‘벼루재’ 등이 그 예이다. ㉣ ‘벼락’이나 ‘베락’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락산’ㆍ‘벼락고개’ㆍ‘벼락골’ㆍ‘벼락바위’ㆍ‘벼락배미’ㆍ‘베락골’ㆍ‘베락매’ㆍ‘베락바우’ 등이 그 예이다. ㉤ ‘비럭’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비럭골’ㆍ‘비럭굴’ㆍ‘비럭동’ㆍ‘비럭뜸’ㆍ‘비럭바구’ㆍ‘비럭보’ㆍ‘비럭재’ 등이 그 예이다. ㉥ 이밖에도 ‘베루’ㆍ‘베리’ㆍ‘비링이’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베루골’ㆍ‘배루들’ㆍ‘베루메’ㆍ‘베루모퉁이’, ‘베리끝’ㆍ‘베리미’ㆍ‘베리바우’ㆍ‘베리산’ㆍ‘베리재’ㆍ‘비링이들’ 등이 그 예이다. 본 예 ‘바랑골’은 넷째의 해석대로 ‘벼랑으로 되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방죽들 : ‘벌말’ 서쪽에서 37사단부대 사이에 있는 들판이다. ‘방죽들’은 ‘방죽’과 ‘둘’로 나뉘며, ‘방죽 부근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지금도 군부대 안에 방죽이 남아 있다.연천저수지(連川貯水池) : ‘연천’에 있는 저수지이다. ‘연천저수지’는 ‘연천’과 ‘저수지’로 나뉘며, ‘연천에 있는 저수지’로 풀이된다. 현재도 이용된다.연천천(連川川) : ‘연천’에서 발원하여 ‘반탄교’ 부근에서 보강천에 합류하는 내이다. ‘연천천’은 ‘연천’에 기대어 붙은 이름이다.전지골(田地-) : ‘궁골’ 북쪽, ‘벌말’에서 볼 때 ‘동녘골’ 왼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전지골’은 ‘전지’와 ‘골’로 나뉘며, ‘논밭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텃골 : ‘동녘골’과 ‘전지골’ 사이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텃골’은 ‘터’와 ‘골’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이다. ‘터’는 ‘집이나 건물 등을 지었거나 지을 자리’를 뜻하니, ‘텃골’은 ‘집이나 건물 자리가 되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아마도 과거 이곳에는 집이나 건물 등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신동1리 ‘아랫장뜰/새텃말’을 참고하기 바란다. 퉁적골[銅店-] : ‘바랑골’ 왼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길다. ‘퉁적골’은 ‘퉁점골’의 변화형이고, ‘퉁점골’은 다시 ‘통점골’의 변화형이다. 최초의 어형 ‘통점골’은 ‘통점’과 ‘골’로 나뉘며, ‘통점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통점(銅店)’은 ‘놋그릇점’을 뜻한다. ‘銅’의 중국음이 ‘통’이어서 ‘동점’을 ‘통점’으로 발음한다.
  • 연탄2리(連灘二里) : ㆍ탑선이(塔-)/탑선(塔仙) : ‘벌말’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진천군 초평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탑선리(塔仙里)’로 불리던 곳이다. 전국적으로 ‘탑산이’ 또는 ‘탑선이’란 지명은 매우 많은데, 이들은 모두 ‘탑이 서 있다’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탑선이’는 ‘탑 서다’의 관형사형 ‘탑 선’에 접미사 ‘이’가 붙어 형성된 말로, ‘탑이 서 있는 곳’이란 뜻이 된다. 이것이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탑선’의 ‘선’이 ‘선(仙’)이나 ‘산(山)’으로 변해 ‘탑선(塔仙)’ 또는 ‘탑산(塔山)’이 된다. 실제로 이 마을 끝자락에는 3층 돌탑이 있다. 이 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삼층 돌탑은 신선이 쌓은 탑이라 한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탑선’ 또는 ‘탑선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연탄2리는 진천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증평에서 진천으로, 진천에서 증평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길이 꼬불꼬불한 소로였으며, 또 나무들이 무성했다. 그래서 도적들이 들끓었다. 도적들은 나무숲에 몰래 숨어 있다가 행인이 지나가면 종을 울렸다. 그러면 ‘씨아골’과 ‘상여바우’에 숨어있던 다른 도적들이 신호를 듣고 갑자기 달려들어 행인들을 약탈했다. 그런데 그 종소리가 흡사 사찰의 풍경소리와 같았다. 그래서 행인들은 도적떼와 사찰의 승려가 결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이에 사찰의 승려들은 누명을 벗고자 백일기도를 드렸다. 승려들의 백일기도가 끝날 즈음에 신선이 내려와 종이 울리던 그 자리에 탑을 세워놓았다. 이후로 어떠한 이유인지 더 이상 종이 울리지 않았고, 또 도적떼도 사라졌다. 평범한 몇 기의 돌을 아무런 형식 없이 올려놓은 듯한 형태이지만, ‘어떤 비ㆍ바람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며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이 탑을 신성하게 여기고 있다.(증평군지편찬위원회, 2005: 281).다람절이골 : ‘배너미고개’ 동쪽 위에 있는 골짜기이다. ‘다람절이골’은 ‘다름절이골’의 변화형이다. ‘다름절이골’은 ‘다름절이’와 ‘골’로, ‘다름절이’는 다시 ‘다름절’과 접미사 ‘이’로, ‘다름절’은 ‘다름’과 ‘절’로 나뉜다. ‘다름’을 ‘매달리다[懸]’와 관련시켜 ‘다름절’을 ‘높은 산 위에 달아맨 것처럼 지어진 절’로 풀이한다. 이에 따라 ‘현암사(懸岩寺)’나 ‘현사(懸寺)’라는 지명이 함께 쓰인다. 그렇다면 ‘다람절이골’은 ‘높은 산 위에 달아맨 것처럼 지어진 절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그러나 ‘다름’을 ‘달’과 관련시켜 볼 수 있다. 옛 문헌에 ‘덕(德)’ 또는 ‘달(達)’계 지명이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신라ㆍ백제 지명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대표적인 고구려 어휘로 간주되어 왔다.達川或名德川或名?川在州西八里(新增東國輿地勝覽 卷 14 忠州牧), 高阜曰德(北塞記略 孔州風土記) 여기서 ‘덕(德)=고(高)=달(達)’의 대응관계가 성립된다.高烽縣本高句麗達乙省縣, 高城郡本高句麗達忽, 兎山郡本高句麗烏斯含達縣, 松山縣本高句麗 夫斯達縣, 蒜山縣本高句麗買尸達縣, 菁山縣本高句麗加支達縣, 土山縣本高句麗息達, 蘭山縣 本高句麗昔達縣(三國史記 卷 35), 功木達一云熊閃山(三國史記 卷 37)다시 ‘고(高)=달(達)=산(山)’의 대응관계가 성립되고, 결국 ‘덕(德)=고(高)=달(達)=산(山)’의 대응관계로 요약된다. 따라서 고구려 지명에서 ‘달(達)’ㆍ‘덕(德)’은 ‘높다[高]’나 ‘산(山)’을 뜻한다. 그렇다면 ‘달절’이나, 여기서 변한 ‘다름절’ㆍ‘다람절’은 ‘높은 곳에 있는 절’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다름절이골’는 ‘높은 곳에 있는 절이 있는 골짜기’로 해석된다. 달바우 : ‘다람절이골’ 정상 부근에 있는 바위이다. ‘달바우’는 ‘달’과 ‘바우’로 나뉜다. 지명에서 ‘달(達)’은 ‘높다[高]’나 ‘산(山)’을 뜻한다. 따라서 ‘달바우’는 ‘높은 곳에 있는 바위’나 ‘산에 있는 바위’로 풀이된다. 그러나 ‘달바우’를 ‘달처럼 생긴 바위’ 또는 ‘달맞이 하던 바위’로 풀이할 수도 있다.도독삿골[-砂器-] : ‘탑선이’ 서쪽, ‘굿당’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진천군 초평면 진암리와 경계를 이룬다 ‘도독삿골’은 ‘도독’과 ‘삿골’로 나뉜다. 전국적으로 ‘도독’과 ‘골’이 함께 쓰인 지명이 매우 많다. ‘도독골’은 ‘도덕골’ㆍ‘도둑골’과 섞여 쓰이면서 여러 가지 유래담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도둑골’은 ‘도둑’과 관련하여 ‘도둑이 숨기에 좋을 만큼 후미진 골짜기’로 설명한다. 그러나 ‘도둑골’이 ‘도둑’과 관련되는지는 의문이다. ‘도둑골’과 ‘두둑골’ㆍ‘도둔골’이 함께 쓰이고 있음을 볼 때, ‘도둑’은 ‘돋우다’ㆍ‘두둑’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도둑’은 ‘두두룩한’으로 이해되어 ‘도둑골’이나 ‘도독골’은 ‘두두룩한 형상을 하고 있는 골짜기’로 이해된다. 골짜기가 깊지 않고 두둑하게 올라와 있는 형상일 때 쓰이는 이름이다. ‘삿골’은 ‘사깃골’과 함께 쓰이는 지역이 있다. 그렇다면 ‘도독삿골’은 ‘두두룩한 형상을 하고 있는, 사기점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등잔바우(燈盞-) : ‘배너미고개’ 가기 전, ‘두타산’ 9부 능선쯤에 있는 바위이다. ‘등잔바우’는 ‘등잔’과 ‘바우’로 나뉘며, ‘등잔 모양의 바위’로 풀이된다. 바위 가운데가 파여 등잔 모양일 때 주로 붙는 이름이다.마금골 : ‘탑선이’ 북서쪽, ‘공병대대’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마금골’은 ‘마금’과 ‘골’로 나뉜다. ‘마금’은 ‘막음’으로, ‘막다’의 명사형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마금골’은 '막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배너미고개 : ‘탑선이’ 북쪽에 있는 고개로, ‘두타산’ 정상 가까이에 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龍亭里)에 이른다. 과거 진천 사람들이 증평장을 보고 소에 짐을 싣고는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배너미고개’는 ‘배너미’와 ‘고개’로 나뉜다. 전국적으로 ‘배너미고개’는 매우 흔한 지명인데, 모두 ‘배가 넘어 다녔다’는 유래 설이 결부되어 있다. 이 고개에도 전설이 전한다. 단군이 다스릴 때 이곳에 홍수로 물난리가 났다. 단군의 신하인 팽우가 치산치수를 할 때 배가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는 것이다. 부처젓골 : ‘탑선이’ 북쪽, 예전의 ‘보타사’가 있던 골짜기이다. 현재의 ‘보타사’는 1976년 건립된 태고종 사찰로, 과거 위치에서 100m 정도 아래쪽[연탄리 산63-34번지]에 있다. ‘부처적골’은 ‘부처절골’의 변화형으로, ‘절골’은 지명에서 흔히 ‘젓골’이나 ‘적골’로도 나타난다. ‘절골’에 사이시옷이 개재하여 ‘젌골’이 되고, ‘젌골’에서 ‘ㄹ’이 탈락하면 ‘젓골’이 된다. 다시 ‘젓골’이 미파화에 의해 ‘젇골’이 되고, ‘젇골’이 연구개음화에 의해 ‘적골’이 될 수 있다. 즉 ‘절골>젌골>젓골>젇골>적골>’의 변화 과정을 상정할 수 있다. 최초의 어형 ‘절골’이나 이에서 변한 ‘젓골’ㆍ‘적골’은 전국적으로 매우 흔한 지명인데, 대부분 ‘절이 있는 골짜기’란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부처젓골’은 ‘부처 절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산길(山-) : ‘탑선이’ 서쪽으로 ‘동국산업’ 옆에 있던 옛 길이다. 34번국도가 개설되면서 그 안에 포함되었다. ‘산길’은 ‘산’과 ‘길’로 나뉘며, ‘산으로 난 길’로 풀이된다. 상여바우(喪輿-) : ‘탑선이’ 북쪽, ‘두타산’ 정상에 있는 바위이다. ‘상여바우’는 ‘상여’와 ‘바우’로 나뉘며, ‘상여 모양으로 생긴 바위’로 풀이된다. 씨아골 : ‘탑선이’ 서쪽, ‘동국산업’의 석산개발 현장 인근에 있는 골짜기이다. 석산개발은 이미 끝났다. 이곳은 연탄2리와 진천군 초평면의 경계이다. ‘씨아골’은 ‘씨아’와 ‘골’로 나뉜다. ‘씨아’는 목화송이에서 씨를 제거하는 기구로, ‘씨아틀’ㆍ‘씨아시’ㆍ‘씨에기’ㆍ‘씨애’ㆍ‘타리개’로도 불린다. 씨아에 목화송이를 넣어 앗으면 씨는 뒤로 떨어지고 목화솜은 앞으로 빠진다. ‘씨아골’은 ‘씨아 모양으로 생긴 골짜기’로 풀이된다. 약목골[藥-] : ‘마금골’과 ‘배너미고개’ 중간에 있는 골짜기이다. ‘약목골’은 ‘약못골’의 변화형이다. 즉 ‘약못골’이 미파화에 의해 ‘약몯골’로, 연구개음화에 의해 다시 ‘약목골’로 실현된 것이다. ‘약못골’은 ‘약못’과 ‘골’로 나뉜다. 여기서 ‘약못’은 ‘약물탕’을 뜻하니, ‘약목골’은 ‘약물탕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지개태고개[地界-] : ‘탑선이’ 서북쪽, 진천 방면으로 34번국도를 따라가면 ‘보타사’에 이른다. 이 절 앞을 지나면 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가 진천군 초평면 진암리와 경계를 이루는 ‘지개태고개’이다. ‘지개태고개’는 초평 방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다보니 짐을 지게에 짊어지지 않고는 이곳을 넘어가지 어렵다고 해서 이름이라 전한다. 그러나 ‘지개태고개’는 ‘지계터고개’의 변화형이다. ‘지계터고개’는 ‘지계터’와 ‘고개’로 나뉘고, ‘지계터’는 다시 ‘지계’와 ‘터’로 나뉜다. ‘지계(地界)’는 ‘지역의 경계’라는 뜻이다. 따라서 ‘지개태고개’는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터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현재 이 고개는 34번국도로 개설되어 많이 낮아졌다. ‘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신동1리 ‘아랫장뜰/새텃말’을 참고하기 바란다. 지경골(地境-)/재경골[地境-] : ‘탑선이’ 동북쪽으로 나 있는 골짜기이다. ‘지경골’은 ‘지경’과 ‘골’로 나뉜다. ‘지경’은 ‘지경(地境)’으로, ‘지역의 경계’라는 뜻이다. 따라서 ‘지경골’은 ‘지역의 경계가 되는 골짜기’로 해석된다. 달리 ‘재경골’로도 불리는데, ‘재경골’은 ‘재경’과 ‘골’로 나뉜다. ‘재경’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재궁(齋宮)’의 변화형으로 보아 ‘재실이 있는 골짜기’로 보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재경골’과 ‘자경골’이 병용되는 예가 많음을 이유로 ‘자경골’ 즉, ‘가경골’로 보는 견해이다. ‘가경골(佳景-)’은 ‘아름다운 경치의 골짜기’로 풀이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경골’과 병용되는 것으로 보아, ‘지역의 경계가 되는 골짜기’로 풀이할 수 있다. 풀무골 : 공병대대 뒤편, ‘마금골’ 북쪽으로 이어진 골짜기이다. ‘풀무골’은 ‘풀무’와 ‘골’로 나뉜다. ‘풀무’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이다. 따라서 ‘불무골’은 ‘풀뭇간[대장간]이 있는 골짜기’로 해석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풀무’의 중세국어 ‘불무골’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자 지명 ‘야동(冶洞)’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연탄3리(連灘三里) : 쇠마루/금헌(金軒)/새터 :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와 접해 있는 마을로, ‘벌말’ 서쪽에 있다. 육군37사단 정문 앞에 있다. 예전의 청주군 북강내이면(北江內二面) ‘금헌리(金軒里)’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괴산군 증평면 연탄리에 편입되었다. ‘쇠마루’는 ‘쇠’와 ‘마루’로 나뉜다. 후부요소 ‘마루’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으니, ‘고(高)’를 뜻하는 백제어 ‘毛良’[*모랑]이나 중세국어 ‘??[宗]’와 관련된다. 高敞縣本百濟毛良夫里縣(三國史記 卷 36), 곳??쥰(準)(字會上 26), 등??쳑(脊)(字會上 27ㆍ類合下 51), ?? 종(宗) (字會上 32)ㆍ(類合 上 23ㆍ下 59) 지명의 후부요소로서 ‘마루’는 ‘마루’ 외에 ‘말’ㆍ‘마리’ㆍ‘말양’ㆍ‘말랑’ㆍ‘말랑이’ㆍ‘날망’으로 나타나는데, ‘평지보다 약간 높으면서 평평한 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한자로는 ‘지(旨)’ㆍ‘간(幹)’이 대응된다. 한편 ‘마루’는 후부요소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요소로도 적극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때에는 ‘넓은’ㆍ‘큰’ㆍ‘높은’ㆍ‘으뜸인’의 뜻을 지닌다. ‘마루’의 뜻이 위와 같다면 ‘쇠’는 관형어로 ‘소의[牛]’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쇠마루’는 ‘소들이 풀을 뜯는, 높으면서 평평한 곳’으로 해석된다. ‘금헌’은 ‘쇠마루’의 ‘쇠’를 뜻을 잘못 알고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새터’는 ‘새’와 ‘터’로 나뉘며, ‘새로 생긴 터’로 풀이된다. ‘터’는 일찍부터 지명에 쓰였으니, 고구려 지명에서 ‘제(?)’와 대응되는 ‘吐’ㆍ‘刀’(*토)가 보인다. 현대 지명에서도 ‘터’는 매우 생산적인 후부요소로, 한자로는 ‘대(垈)’가 대응된다. 또한 ‘터’ 외에 ‘태’ㆍ‘테’ㆍ‘퇴’ㆍ‘때’ㆍ‘턱’으로도 보인다. 의미 영역도 터 이름 외에 마을ㆍ들ㆍ골ㆍ산 이름에 전용되고 있으며, 특히 마을 이름이 가장 많다.그러나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예전에는 이 마을 서쪽 ‘왕개들’ 부근에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 살던 부잣집의 마루가 쇠로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쇠마루’라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이 마을에 천석꾼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탁발승이 이 부잣집을 들렀는데, 주인이 심하게 욕을 했다. 이에 스님이 괘씸하게 여겨 집을 나오면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참 아깝구나. 저 밑에 보를 막으면 이 집은 만 석을 할 수 있는데…….”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말을 들은 천석꾼은 만석꾼이 되려고 보를 만들었는데 그 해 큰 장마로 봇물이 그 집을 덮쳐 장마가 끝난 뒤 그 집은 온데간데없고 쇠마루만 덩그러니 남았다는 것이다. ‘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신동1리 ‘아랫장뜰/새텃말’을 참고하기 바란다. 단말들 : 증평문화회관 뒤편에 있는 들로 매우 넓다. 연탄4리와 경계를 이루는 들로, 남쪽에서 보강천에 닿아 있다. ‘단말들’은 ‘단말’과 ‘들’로, ‘단말’은 다시 ‘단’과 ‘말’로 나뉜다. 지명에서 ‘단’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첫째는 ‘단(檀)’으로 보아, ‘높직하게 만들어 놓은 자리’로 쓰인다. 둘째는 ‘단(端)’으로 보아, ‘끝’으로 쓰인다. 셋째는 ‘단골’로 보아, ‘무당’의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본 예도 이에 준하여 풀이할 수 있겠다. 방차안들(防遮-) : ‘쇠마루’와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접경 지역에 있는 들이다. ‘방차안들’은 ‘방차’와 ‘안들’로, ‘안들’은 다시 ‘안’과 ‘들’로 나뉜다. ‘방차(防遮)’는 ‘막아서 가리는 것’이라는 뜻인데, 지명에서는 대체로 ‘제방(堤防)’의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방차안들’은 ‘방차 안쪽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왕개들 : ‘쇠마루’에서 서북쪽으로 용기리와의 경계 지점에 있는 들이다. ‘왕개들’은 ‘왕개’와 ‘들’로 나뉜다. 여기서 ‘왕개’는 ‘왕(王) 가’ 즉 ‘왕(王) 씨’로 보기도 하고, ‘왕이 날 명당’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안개’의 변화형으로 보아, ‘안개[霧]’나 ‘내포(內浦)’ 즉 ‘냇물 안쪽’으로 볼 수도 있다.연신천(連新川) : ‘보타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일산업’ 밑 500m 지점에서 보강천에 합류하는 내이다. ‘연신천’은 연탄1리 ‘연신[벌말]’에 기대어 붙은 이름이다.질밭들 : ‘쇠마루’와 금곡4리 사이에 있는 들판으로, 땅이 질다고 한다. 군부대 관사 주변이다. ‘질밭들’은 ‘질밭’과 ‘들’로, ‘질밭’은 다시 ‘질’과 ‘밭’으로 나뉜다. ‘질’은 ‘질그릇을 만드는 흙’을 뜻하니, ‘질밭들’은 ‘질그릇을 만드는 흙으로 되어 있는 밭 들’로 풀이된다. 질밭장등들 : ‘쇠마루’ 동쪽, 송산리와 사이에 있는 들이다. ‘질밭장등들’은 ‘질밭’과 ‘장등들’로, ‘장등들’은 ‘장등’과 ‘들’로 나뉜다. ‘장등’은 ‘산마루’의 방언형이니, ‘질밭장등들’은 ‘질밭 부근, 산마루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짐대울들 : ‘쇠마루’ 남쪽 510번지방도 건너 ‘동일산업’ 뒤편에 있는 들이다. ‘짐대울들’은 ‘짐대울’과 ‘들’로, ‘짐대울’은 다시 ‘짐대’와 ‘울’로 나뉜다. ‘짐대’는 ‘당(幢)을 달아 세우는 대’를 뜻하고, ‘울’은 ‘골’과 같은 뜻이니 ‘짐대울들’은 ‘당(幢)을 달아 세우는 대가 있는 골짜기의 들’로 풀이된다. ‘당(幢)’은 ‘법회 따위의 의식이 있을 때에 절의 문 앞에 세우는 깃발’을 말한다.
  • 연탄4리(連灘四里) : ㆍ분투골[粉-]/금곡(金谷)/금암(金岩) : ‘벌말’ 동남쪽, ‘안자산’[송산2리] 밑에 있는 마을로, 풍수지리설로 볼 때 반용농주형(盤龍弄珠形: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한 용이 구슬을 갖고 희롱하며 노는 형)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조선 시대 각종 기록에 보이는 곡은곡소(谷銀谷所)의 터로 추정되며, 마을 뒤쪽에 청석(靑石)을 캤던 흔적이 남아 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금곡(金谷)’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金谷里/분특골’로 기록되어 있다. ‘분투골’은 ‘분토골’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분토골’과 ‘분투골’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들에는 ‘분토가 난다’는 유래담이 관련되어 있다. ‘분토(粉土)’는 ‘방앗간에서 쌀을 찧을 때에 섞는 희고 고운 가루 흙’을 말한다. 따라서 ‘분투골’은 ‘분토골(粉土-)’이 변한 것으로, ‘분토가 나는 골짜기’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지명 중에는 ‘분터골’도 대단히 많다. ‘분터골’은 ‘분터’와 ‘골’로 나뉘고, ‘분터’는 다시 ‘분’과 ‘터’로 나뉜다. ‘분터골’ 또한 분토와 관련되는 것을 볼 때, ‘분’은 ‘분토(粉土)’를 뜻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분터골’은 ‘분토가 나는 터를 가진 골짜기’로 풀이된다. 이상을 정리하면, ‘분투골’은 ‘분토골(粉土-)’이나 ‘분터골(粉-)’에서 변한 말로, ‘분토가 나는 골짜기’나 ‘분토가 나는 터가 있는 골짜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마을은 달리 ‘금곡(金谷)’으로도 불리는데, ‘금곡’은 ‘금골’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금골’은 ‘금’과 ‘골’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금’은 ‘?’과 관련된다. ‘?’은 상대(上代)의 신앙ㆍ정신면과 관련되는 바, ‘크다[大]’를 뜻하게 된다. 따라서 ‘금골’이나 ‘금곡’은 ‘큰 골짜기’로 해석된다. 또 다른 지명 ‘금암’은 ‘큰 바위’라는 뜻이니, 마을에 큰 바위가 있어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연탄1리 ‘궁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ㆍ반여울1/반월/반탄(潘灘) : 보강천 너머 증평종합스포츠센터ㆍ증평국민체육센터실내수영장 뒤편에 있는 마을과 진천 방면으로 가다 연탄1리 ‘벌말’로 접어드는 초입에 있는 마을을 통틀어 일컫는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반탄(潘灘)’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潘灘里/반여울’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장(場)이 섰던 곳으로 추정되며, 주막이 많았다고 한다. 증평문화회관ㆍ증평종합스포츠센터ㆍ증평국민체육센터실내수영장ㆍ대원전기(주)ㆍ증평유스호스텔이 자리하고 있다. ‘반여울1’은 이 마을이 ‘반여울2’ 부근에 있어 붙은 이름이고, ‘반월’은 ‘반여울’의 변화형이다. ‘반탄’은 ‘반여울’에 대한 한자 표기로, ‘반(潘)’은 본래의 뜻과 관계없이 붙은 것이다. 반여울2 : ‘반여울1’[마을] 앞에 있는 보강천의 여울이다. ‘반여울’은 ‘반’과 ‘여울’로 나뉜다. 여기서 ‘반’은 한결같이 지형이 반달 모양이라는 유래담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반여울’은 ‘반달 모양의 여울’로 풀이할 수 있다. 보강천이 마을을 반달 모양으로 감싸고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반여울’과 ‘반달’은 의미상으로 통하지 않는다. ‘반여울’은 ‘반’과 ‘여울’로 나뉜다. ‘반’은 ‘소반(小盤)’을 뜻한다. 따라서 ‘반여울’은 ‘소반처럼 평평하고 밋밋하게 흐르는 여울’로 풀이된다. 그러나 ‘반여울’에 대한 어원을 달리 추정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가정리에 ‘반여울’[마을]이 있다. 고려 때 이곡이 원나라에 처녀 공출을 막은 죄로 이곳에 유배되어 ‘앞내[금당천]’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더 멀리 귀양을 보내라는 전지가 내렸다. 전지를 받은 관원이 왔는데, 마침 장마가 져서 건너지 못하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맞춰 조정에서는 이곡의 죄를 풀어 다시 등용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봉명 관원이 이곳에 이르니, 반쪽은 홍수요 반쪽은 맑은 물이 되어 무사히 조정으로 가게 되었다. 이 일화를 관련시키면, ‘반여울’은 ‘반여울(半-)’ 즉 ‘반 정도가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일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탄교(潘灘橋)/요단강다리(-江-) : ‘반여울2’[여울]에 놓인 다리로, 길이 20mㆍ너비 3m이다. 반탄교는 ‘반여울2’에 놓인 다리라서 붙은 이름이다. ‘요단강다리’는 군부대와 관련된 이름이다. 1955년 5월 20일 강원도 양구에서 창설된 37사단이 그 해 6월 22일 증평으로 부대를 이전했다. 신병훈련소이기도 한 이 부대에서 고된 훈련을 받은 젊은이들이 찬송가에 나오는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란 구절을 떠올려 하루빨리 훈련을 마치고 이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한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다. 밤나무숲댕이[-堂-] : 증평문화회관 건너편에 있던 숲으로, 청원군 북이면 추학리와 경계를 이룬다. ‘밤나무숲댕이’는 ‘밤나무숲당’에 접미사 ‘이’가 붙고, 이것이 이모음역행동화를 일으킨 어형이다. ‘밤나무숲당’은 ‘밤나무 숲에 있는 불당이나 굿당’을 뜻한다. 따라서 ‘밤나무숲댕이’는 ‘밤나무 숲이 있는 불당이나 굿당 자리’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곳에는 초가삼간이 하나 있었고, 주변에 밤나무가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 문화재 ]

연탄리삼층석탑(連灘里三層石塔) : 연탄2리 ‘탑선이(塔仙-)’ 입구에 있는 탑이다. 마을 이름 ‘탑선이’ 또는 ‘탑선’은 이 탑으로 인해 생겼다. 비록 엉성한 형태이지만, 연대를 추정할 수 없는 두 기의 탑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비지정문화재이다.연탄리출토석검(連灘里出土石劍) : 연탄리에서 1977년 8월 6일에 마제석검(磨製石劍)이 출토되었다. 이는 주변 지역 송정리에서 출토된 고인돌과 함께 증평 지역 청동기시대 문화를 보여주고 유물이다. 출토된 석검의 재질은 흑색 혈암제(頁巖製)이고, 크기는 길이 26cm이다. 일단병식(一段柄式)의 작은 검으로 검 끝이 약간 떨어져 나갔으나 원형에 가깝다. 검 끝에서 자루까지 능각(稜角)을 세웠으며, 봉부(鋒部)는 형성되지 않아 검 날에서 자루로 이어진다, 검 자름면은 마름모형이고 자루면은 육각형이다. 출토된 마제석검은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