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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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웃으로 살아가는 촌락

송산리 (松山里)

[ 연혁 ]

송산리(松山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송산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송치리(松峙里)ㆍ안자산리(顔子山里)ㆍ미륵리(彌勒里)ㆍ평사리(坪沙里) 등 4개리이다. 그 뒤 송산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근서면(近西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송치리(松峙里)가 송치리와 송오리(松五里)로 나뉘었고, 안자산리(顔子山里)는 안자산리(安子山里)로 변경되었다. 또한 평사리(平沙里)가 없어지고 사곡리(沙谷里)가 새로 생겨났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송산리는 근서면 송치리(松峙里)ㆍ송오리(松五里)ㆍ안자산리(安子山里)ㆍ미륵리(彌勒里)ㆍ사곡리(沙谷里)의 각 일부와 청주군(淸州郡)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초중리(楚中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송치리와 안자산리의 이름을 따서 송산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송산리는 장평지소(莊坪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가 되었다.

[ 유래 ]

송산리는 1914년에 송치리와 안자산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송산리는 증평읍사무소에서 증평대교를 건너 두타산 안쪽에 있는 마을로, 두타산을 사이에 두고 진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34번국도가 관통하는 이곳은 현재 대한주택공사의 송산지구택지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어 2010년께 이 사업이 완료되면 이곳에는 2,800여 가구의 공동ㆍ단독주택이 들어서 신시가지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증평인삼바이오센터와 계룡병원 사이에는 충북인삼유통센터가 2009년 7월께 준공될 예정이다. 2010년 5월 현재 187세대에 457명이 거주하고 있다.

  • 송산1리(松山一里) : 솔고개1/송티(松-)/송치(松峙) : 송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송치(松峙)’로 불리던 곳이다. 증평읍사무소에서 증평대교를 건너 2km 정도 가다보면 두타산에 이른다. 이 산의 '솔고개2'[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고개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쓰인 예이다. 대마산들(大馬山-) : ‘솔고개1’[마을] 남쪽에 있던 들이다. ‘송산리도시계획정리지구’로 편입되어, 대한주택공사에서 택지로 개발하였다. ‘대마산들’은 ‘대마산’과 ‘들’로, ‘대마산’은 ‘대’와 ‘마산’으로 나뉜다. 여기서 ‘대’는 ‘크다[大]’의 뜻이다. 한자 지명 ‘마산’은 고유어 지명 ‘말미’나 ‘말매’에 대응된다. 전국적으로 ‘말’은 ‘말미’나 ‘말매’ 외에 ‘말개’ㆍ‘말거리’ㆍ‘말고개’ㆍ‘말골’ㆍ‘말구렁’ㆍ‘말나루’ㆍ‘말들’ㆍ‘말무덤’ㆍ‘말배미’ㆍ‘말봉’ㆍ‘말산’ㆍ‘말샘’에서와 같이 매우 흔히 사용되는 전부요소이다. 이들 대부분은 한자 ‘마(馬)’나 ‘두(斗)’로 표기되면서 ‘마(馬)’나 ‘두(斗)’와 관련된 유래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니, 이때의 ‘말’은 오히려 ‘크다[大]’와 관련된다. ‘미’나 ‘매’는 ‘산’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마산’은 ‘말미’나 ‘말매’와 마찬가지로 ‘큰 산’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대마산들’은 ‘큰 산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이 들은 ‘안자미’와 미암1리 ‘미륵댕이’ 사이에 있는 들로, ‘안자산’이라고 하는 큰 산에 붙어 있는 들이라서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방죽골 : ‘솔고개1’[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방죽골’은 ‘방죽’과 ‘골’로 나뉘며, ‘방죽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방죽’은 ‘파거나 둑으로 둘러막은 못’을 말한다. 이 골짜기에는 현재 방죽이 남아 있다.솔고개2/송티(松-)/송치(松峙) : ‘솔고개1’[마을]에서 연탄1리로 갈 때 넘는 고개로, 현재 포장농로로 되어 있다. 이 고개는 소나무가 많은 고개라서 ‘솔고개’라 불렀는데, 이것이 한자화하여 ‘송티(松-)’ 또는 ‘송치(松峙)’로 표기된 것이다. 그러나 ‘솔고개’를 달리 풀이할 수도 있다. ‘솔고개’는 ‘솔’과 ‘고개’로 나뉜다. 여기서 ‘솔’은 ‘솔다’의 어간이요, ‘솔다’는 ‘공간이 좁다’를 뜻한다.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솔고개’는 ‘공간이 좁은 고개’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이럴 경우 어간에 어미도 없이 명사 ‘고개’와 직접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비통사적 합성명사의 경우 이런 예는 아주 많다.송산소류지(松山小溜池) : ‘솔고개1’[마을]과 ‘안자미’ 중간에 있는 저수지이다. ‘송산소류지’는 ‘송산’과 ‘소류지’로 나뉘며, ‘송산리에 있는 못’으로 풀이된다. 지금도 남아 있다.역들(驛-) : ‘솔고개1’[마을] 남쪽에 있는 들이다. ‘솔고개1’[마을]과 ‘안자산1’[마을]의 경계이다. ‘역들’은 과거 청안현 시절 시화역에 딸린 들이라 붙은 이름이다.황새말 : ‘솔고개1’[마을] 동쪽에 있는 들이다. 현재 ‘계룡병원’이 들어와 있다. 황새말은 황새와 말로 나뉘며, ‘황새가 많이 서식하는 마을’로 풀이된다.
  • 송산2리(松山二里) : ㆍ안자산(安子山)1/안자산리(安子山里)/안재산[安子山]/안자뫼(安子-)/안자미(安子-)/안재미[安子-] : ‘솔고개1’[마을] 남쪽으로, ‘안자산2’[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안자산리(顔子山里)’로 기록되어 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안자산(安子山)’으로 불리던 곳이다. 마을은 ‘안자산’ㆍ‘안자산리’ㆍ‘안재산’ㆍ‘안자뫼’ㆍ‘안자미’ㆍ‘안재미’ 등은 모두 ‘안자산2’[산] 밑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감빙이[-峰-] : ‘안자산1’[마을]의 옆[서북쪽]에 있는 ‘서당골’에서 연탄4리 ‘분투골’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산이다. ‘감빙이’는 ‘감봉이’의 변화형이다. ‘감봉이’가 이모음역행동화에 의해 ‘감뵝이’로, 다시 모음변동에 의해 ‘감빙이’로 실현된 것이다. ‘감봉이’는 ‘감봉’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고, ‘감봉’은 ‘감’과 ‘봉’으로 나뉜다. ‘감’은 동사 ‘감다’의 어간이고, ‘봉’은 ‘봉우리’를 뜻한다. 따라서 ‘감봉이’나 변화형 ‘감빙이’는 ‘감아 도는 봉우리’로 풀이된다. 냇개 : 증평대교 아래로 흐르는 보강천을 말한다. 이 내는 증평의 젖줄이다. ‘냇개’는 ‘냇가’의 방언형이다.둠배골 : ‘안자산1’[마을] 서쪽으로, 호국충용사[송산리 산65번지에 있는 조계종 사찰로, 1991년 건립]와의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둠배들’은 ‘둠배’와 ‘들’로, ‘둠배’는 다시 ‘둠’과 ‘배’로 나뉜다. ‘둠’이나 ‘듬’은 ‘덤’의 방언형이고, ‘덤’은 ‘더미’와 같은 말로, ‘많은 물건이 한데 모여 쌓인 큰 덩어리’로 풀이된다. 따라서 ‘듬배’는 ‘여러 개가 더미로 얹혀 있는 바위’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둠배들’는 ‘여러 개가 더미로 얹혀 있는 바위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매뚝 : ‘홈개울’의 범람을 막기 위해 ‘안자산경로당’ 부근에 쌓은 둑이다. ‘매뚝’은 ‘매둑’의 변화형이다. 여기서 ‘매’는 ‘물’을 뜻한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미’계 지명은 두 가지 다른 어원에서 출발하였다. 하나는 ‘산(山)’을 뜻하는 신라어 ‘芼兮’(*뫼ㅎ)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水)’ㆍ‘천(川)’ㆍ‘정(井)’을 뜻하는 고구려어 ‘買’(*마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買’는 고구려 지명 ‘內乙買一云內?米, 買召忽縣一云彌鄒忽’(三國史記 卷 37)에서 ‘米’ㆍ‘彌’와 통용되기도 했다. 水城郡本高句麗買忽郡, 沙川縣本高句麗內乙買縣, 伊川縣本高句麗伊珍買縣(三國史記 35), 水入縣一云買伊縣, 水谷城縣一云買旦忽, 南川縣一云南買, 泉井郡一云於乙買, 買忽一云水城(三國史記 卷 37) 따라서 현용 ‘미’계 지명 중 ‘수(水)’ㆍ‘천(川)’ㆍ‘정(井)’이 함께 사용되거나 유래담이 이들과 관련 있는 예는 고구려어 ‘買’에 소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는 지명에서 ‘매’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매둑’이나 ‘매뚝’은 ‘물을 막는 둑’으로 풀이된다.모종뿌리[茅亭-] : ‘서당골’에 있는 산이다. ‘모종뿌리’는 ‘모정뿌리’의 변화형이다. ‘모정뿌리’는 ‘모정’과 ‘뿌리’로 나뉜다. ‘모정’은 ‘모정(茅亭)’으로, ‘짚이나 새 따위로 이은 정자’를 말한다. ‘뿌리’는 ‘부리’의 변화형이다. ‘부리’는 백제어 ‘夫里’(*부리)에 소급되는데, 고구려어 ‘忽’(*홀ㆍ*골)이나 신라어 ‘火ㆍ伐’(*불)과 동계어로 추정된다. 扶餘郡本百濟所夫里郡, 陵城縣本百濟?陵夫里郡, 靑正縣本百古良夫里縣, 玄雄縣本百濟未冬夫里縣, 高敞縣本百濟毛良夫里縣(三國史記 卷 36)이 ‘부리(夫里)’는 신라어 ‘불’과는 달리 어말모음을 보존하고 있는데, 『용비어천가』에 보이는 ‘熊津 고마??’(용 4: 23 註)의 ‘고마’도 백제어의 잔영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고마’는 중세국어에서는 일반적으로 ‘곰’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마’는 고대일본어 ‘구마[熊]’와도 일치한다.日本舊記曰以久麻那利賜末多王盖是誤也久麻那利者任那國下?呼梨縣別邑也(日本書紀 卷14 雄略天皇 21年), 達率餘百進據中部久麻怒利城(日本書紀 卷 26 齊明天皇 6年)이처럼 ‘뿌리’를 백제어 ‘부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면, 이런 ‘뿌리’는 본래 ‘성(城)’이나 ‘동(洞)’을 뜻하는 말이다. 다만 현대지명에서는 의미변화가 일어나, 대개는 ‘산부리, 즉 산의 어느 부분이 부리같이 쑥 내민 곳’을 뜻하게 된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모정뿌리’나 ‘모종뿌리’는 ‘모정이 있는, 산의 어느 부분이 부리같이 쑥 내민 곳’으로 풀이된다. 여기서 ‘모정’은 ‘서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모정으로 인해 ‘서당골’이란 이름이 붙었다. 밤나무숙정이[-亭-] : ‘안자산1’[마을]와 보강천 사이에 있던 밤나무 숲이다. 예전에 보강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보강천 제방과 ‘봇들’에 밤나무를 심었다. ‘송산리도시계획정리지구’로 편입되어, 대한주택공사에서 택지로 개발하였다. ‘밤나무숙정이’는 ‘밤나무숙정’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고, ‘밤나무숙정’은 ‘밤나무숲정’의 변화형이다. 그렇다면 ‘밤나무숙정이’는 ‘밤나무 숲이 정자를 이룬 곳’으로 풀이된다. 봇들(洑-) : ‘안자산1’[마을]와 보강천 사이에 있던 들이다. 과거 ‘밤나무숙정이’가 있던 곳으로, 보강천에 보를 만들어 농업용수로 쓰던 들이다. 아래에는 늪 지대였다. ‘송산리도시계획정리지구’로 편입되어, 대한주택공사에서 택지로 개발하였다. ‘봇들’은 ‘보’와 ‘들’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으로, ‘봇물로 농사짓는 들’을 뜻한다. 서당골(書堂-) : ‘안자산1’[마을]의 옆[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에 마을과 서당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지금도 밭에서 기와 조각이 발견된다. 영ㆍ호남 지방에서 진천 ‘농다리’를 거쳐 한양으로 갈 때 지나는 길목이었다. 송산들(松山-) : ‘안자산1’[마을]과 미암1리 ‘미륵댕이’의 경계에 있는 들이다. 이 들 중 송산2리 ‘안자산1’[마을] 앞[남쪽]에 있는 들로, 보강천과 닿아 있다. ‘송산리도시계획정리지구’로 편입되어, 대한주택공사에서 택지로 개발하였다. ‘송산들’은 ‘송산’과 ‘들’로 나뉘며, ‘송산리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안자산2 : ‘안자산1’[마을]이 있는 산이다. ‘안자산’에 대한 최초 기록인 ‘안자산(顔子山)’은 ‘사람의 이마처럼 둥글넓적한 모양으로 시원하고 평안한 정감을 주는 작은 야산(野山)’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자산’을 달리 풀이할 수도 있다. ‘안자산’는 ‘안잣산’의 변화형으로 볼 수 있다. ‘안잣산’은 ‘안잣’과 ‘산’으로, ‘안잣’은 ‘안’과 ‘잣’으로 나뉜다. ‘안’은 ‘내(內)’를 뜻하고 ‘잣’은 ‘성(城)’을 말한다. ‘잣’은 정음 문헌에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어휘지만, 일찍이 신라어계로 추정되어 왔다. 고대일본어에 ‘자시[城]’가 보이는데, 이것은 신라어 차용어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본 예에서는 ‘잣’을 ‘두타산성’과 관련시켜, ‘안잣산’ 또는 ‘안자산’을 ‘성 안을 이루는 산’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안자산(顔子山)’에는 이름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삼기천 중 남하리 앞내를 증자천(曾子川)이라 한다. 그리고 증평읍과 도안면의 경계되는 곳에 이승산(이성산, 尼聖山)이 있다. 여기서 ‘이(尼)’는 공자의 이름을 의미한다. 공자는 유학의 종장으로서 성인의 반열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이승산은 즉 ‘성인산’ 내지 ‘공자산’ 이라는 뜻이 된다. 공자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제자들의 숭앙을 받았기 때문에 지역에서 이승산 주변의 산이나 내를 이승산을 받드는 제자로 상정하고, 주변의 산과 하천에 공자와 직접적으로 연계된 제자의 이름을 결부시켰다. 그래서 안자산(顔子山)과 증자천(曾子川)이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안자산에서 ‘안자’는 공자가 가장 아꼈다고 전하는 제자 안회(顔回)를 의미한다. 또 이승산에서 품고 있는 내를 증자천이라고 하는데, 증자천에서 ‘증자’ 역시 공자가 아꼈던 제자 증자(曾子)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성산ㆍ안자산ㆍ증자천 때문인지 안자산 아래 마을 송산2리에서는 선비가 많이 배출되고 증자천 가에 있는 남하2리 ‘둔덕’에서는 공무원과 선생이 많이 배출하였다 한다(『증평의 뿌리를 찾아서 5집』참조.)여기서 ‘안자뫼(安子-)’ㆍ‘안자미(安子-)’ㆍ‘안재미[安子-]’에 쓰인 ‘뫼’나 ‘미’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신라어에서 ‘산(山)’을 뜻하는 어휘로는 ‘芼兮’(*뫼ㅎ)와 ‘*모리ㅎ’가 존재했다. 이후 ‘*뫼ㅎ’는 ‘뫼’ㆍ‘매’ㆍ‘메’ㆍ‘미’ㆍ‘모’로 변화ㆍ분포되었고, ‘*모리ㅎ’는 ‘*모로ㅎ’ㆍ‘모로’ㆍ‘모루’로 변화ㆍ분포되었다. 『용비어천가』에는 ‘미’계 지명이 모두 6례가 나오는데, ‘모로’ 1례를 제외하면 나머지 5례는 모두 ‘뫼’로만 나타난다. 여기서 『용비어천가』에 보이는 1례 ‘모로’는 ‘*모리ㅎ’에서 변한 예요, 나머지 5례 ‘뫼’는 ‘芼兮’(*뫼ㅎ)에서 변한 예로 보인다. 기타 정음 문헌 대부분은 ‘산(山)’이 ‘뫼ㅎ’로 나타난다.孝靈縣本芼兮縣, 杞溪縣本芼兮縣一云化?(三國史記 卷 34>, 뫼 爲山(訓解), 城山 잣뫼(용 1: 52), ?山 피모로(용 4: 21), 堂山 당뫼(용 4: 21), 馬山 ?뫼(용 5: 42), 鼎山 솓뫼, 荒山 거츨뫼(용 7: 8), 뫼 어둠 말라(莫尋山)(金 삼 2: 23), ??과 뫼콰? 됴코(江山好)(杜초 8: 44)현대 지명에서 ‘미’계 지명은 ‘매’ㆍ‘메’ㆍ‘모이’ㆍ‘뫼’ㆍ‘미’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 고유지명 외에 한자지명 ‘봉(峰)’ㆍ‘산(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수효에 있어, ‘미’계 지명은 소수이나, 이보다 ‘봉(峰)’계 지명은 더 많고, ‘산(山)’계 지명은 더 많다. 또 ‘미’ 뒤에 ‘봉(峰)’ㆍ‘산(山)’이 붙거나 ‘봉(峰)’ 뒤에 ‘산(山)’이 붙는 예도 허다하나, 거꾸로 ‘봉(峰)’ㆍ‘산(山)’ 뒤에 ‘미’가 붙거나 ‘산(山)’ 뒤에 ‘봉(峰)’이 붙는 예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처럼 수효 면이나 유의중복 면에서 볼 때, 산명의 후부요소들은 ‘미→봉(峰)→산(山)’의 순으로 ‘산(山)’이라는 본래의 뜻을 보다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옻샘 : ‘서당골’ 밑으로 100m 정도에 있던 샘이다. ‘옻샘’은 ‘옻’과 ‘샘’으로 나뉜다. ‘옻’은 ‘옻나뭇과 식물 속에 있는 우루시올(urushiol)에 의한 접촉성 피부염’으로, 빨갛게 붓거나 물집이 생기거나 하여 매우 가렵다. 옻이 오르면 찬물로 닦는 것이 효과적이다. 찬물이 피부염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옻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 찬물 샘을 ‘옻샘’으로 불렀던 것이다. 과거 물이 차고 좋아 피부병에 특별한 효험이 있었다. 지금은 현재는 메워져 형체를 알 수 없다. 우물샘 : ‘옻샘’ 밑으로 400m 정도에 있는 샘이다. 깊이는 깊지 않으나 수원이 마르지 않아, 예전에는 근동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였다. 현재 지붕을 씌우고 잘 보존하고 있다. ‘우물샘’은 ‘우물’과 ‘샘’으로 나뉘며, ‘우물로 이용하는 샘’으로 풀이된다. 큰배미/장구배미 : ‘밤나무숙정이’ 부근에 있는 논이다. ‘송산리도시계획정리지구’로 편입되어, 대한주택공사에서 택지로 개발하였다. ‘큰배미’는 ‘큰’과 ‘배미’로 나뉘며, ‘큰 논배미’로 풀이된다. 달리 ‘장구배미’로도 불린다. ‘장구배미’는 ‘장구’와 ‘배미’로 나뉘며, ‘장구 모양으로 긴 논배미’로 풀이된다.홈개울 : 송산4리 ‘삽사리’에서 ‘안자산1’[마을] 쪽으로 흘러내리던 개울이다. 두타산의 모래가 ‘삽사리’로부터 ‘안자산1’[마을]까지 실려 왔다. 현재는 포장농로로 변했다. ‘홈개울’은 ‘홈’과 ‘개울’로 나뉜다. 전국적으로 ‘홈’이 붙은 지명은 ‘홈거리’ㆍ‘홈건너’ㆍ‘홈골’ㆍ‘홈내’ㆍ‘홈논’ㆍ‘홈들’ㆍ‘홈바우’ㆍ‘홈배미’ㆍ‘홈실’ㆍ‘홈재’ 등 매우 흔하다. 여기서 ‘홈’은 ‘오목하고 길게 팬 부분’을 뜻한다. 따라서 ‘홈개울’은 ‘오목하고 길게 팬 개’로 풀이된다.
  • 송산3리(松山三里) : ㆍ송오리(松五里) : ‘안자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삽사리’로 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로, ‘솔고개1’[마을]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져 있어 ‘송오리’로 불렸다 한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송오리(松五里)’로 불리던 곳이다. 미암리와 도안 사람들이 진천으로 가는 옛 길이 있다. 송오리골(松五里-) : ‘송오리’에서 북쪽으로 대봉산에 오르는 넒은 골짜기이다. ‘송오리골’은 ‘송오리’와 ‘골’로 나뉘며, ‘송오리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 송산4리(松山四里) : ㆍ삽사리/사곡(沙谷) : ‘솔고개1’[마을] 서북쪽으로 두타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서』(정조 13년, 1789년)에는 삽사리를 ‘사읍사리(沙邑沙理)’로 적고 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사곡(沙谷)’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沙谷里/삽사리’로 나타난다. ‘삽사리’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본래 이름인 ‘사읍사리’에서 변한 것이라면, ‘모래가 많은 마을’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달리 부르는 ‘사곡’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곤충에도 ‘삽사리’가 있다. ‘삽사리’는 메뚜기목 메뚜깃과의 곤충으로, 몸길이 20~30mm이다. 몸빛은 누르스름하고 가늘고 길다. 머리꼭대기는 세모졌으며, 앞쪽으로 돌출되었으나 말단은 뾰족하지 않다. 수컷은 앞날개가 짧고 끝이 뭉툭하나, 암컷은 꼬리 끝에까지 달한다. 여름에 풀밭에서 운다. 만일 곤충과 관련 있다면, ‘삽사리가 많은 마을’로 풀이된다. 이 마을은 달리 ‘사곡’으로도 불리는데, 장마가 지면 두타산에서 모래가 많이 내려와 쌓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까치봉(-峰) : ‘삽사리’ 북쪽으로, 대봉산 줄기의 첫 봉우리[해발 522.5m]이다. ‘까치봉’은 ‘까치’와 ‘봉’로 나뉜다. ‘까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까치’를 ‘아치[小]’의 변화형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때 ‘아치’는 ‘작은, 버금의’의 뜻이다. 이 견해는 지명의 전부요소로 등장하는 ‘까치’ 중에는 ‘아치’로부터 변형된 것이 많다는 점에서 주장된 설이다. 그렇다면 ‘까치봉’은 '작은 봉우리'로 풀이된다. 다른 하나는 ‘까치’를 ‘가지[枝]’의 변형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까치봉’은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봉우리’로 풀이된다. 이곳은 두타산의 촤고봉은 아니고, 두세 번째 봉우리이다. 따라서 ‘버금가는 봉우리’로 풀이된다.도룡골 : ‘삽사리’에서 ‘까치봉’에 이르는, 두타산의 골짜기이다. ‘도룡골’은 ‘도룡’과 ‘골’로 나뉘며, ‘도룡뇽이 많은 골짜기’로 풀이된다.큰골 : ‘삽사리’에서 미암4리 ‘대지랭이’ 방향에 있는, 두타산의 골짜기다. ‘큰골’은 ‘큰’과 ‘골’로 나뉘며, ‘큰 골짜기’로 풀이된다.

[ 문화재 ]

ㆍ배극렴묘소(裵克廉墓所) 및 신도비(神道碑) : 송산리 산28번지에 있는 배극렴 묘소 및 신도비이다. 그의 묘소는 송산리 두타산 대야봉 아래에 있다. 배극렴의 묘소는 장방형(長方形)으로 가로 3.47mㆍ세로 4.37mㆍ높이 1.70m이고, 상석은 가로 1.20mㆍ세로 0.84mㆍ높이 0.195m이다. 묘소에는 호석(護石)이 둘러 있고, 앞에는 장명등(長明燈)ㆍ문관석(文官石)ㆍ양석(羊石)ㆍ향로석(香爐石)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묘소 20m 아래에는 고종 25년(1888)에 대사헌 박성양(朴性陽)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으며, 묘소 앞 100m쯤에는 배극렴의 사당인 경절재(景節齊)가 있다. 증평향토문화연구회의 조사ㆍ연구 활동을 통해 문화재의 귀중함을 인식시키고, 보존 관리가 필요함을 각계에 홍보해 1994년 12월 30일에 충청북도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다.배극렴(裵克廉: 1325~1392)은 본관은 경산(京山)으로, 자는 양가(量可)ㆍ호는 필암(筆菴)ㆍ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위위[의장(儀裝)을 맡은 관아] 소윤(小尹: 종4품) 배형보(裵賢輔)와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진주목사(晋州牧使)ㆍ윤주목사(尹州牧使)ㆍ계림부윤(鷄林府尹)ㆍ화령부윤(和寧府尹: 종2품)ㆍ합포진첨사(合浦鎭僉使: 종3품) 등을 역임했고, 우왕 2년(1376)과 우왕 4년(1378) 왜구 격파에 공을 세웠다. 이성계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고 우왕 14년(1388)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위화도회군을 결행했다. 고려 말년 백성들 가운데에는 “비의군자(非衣君子)의 지혜로 삼한(三韓)을 바로 잡는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는 ‘비(非)’와 ‘의(衣)’를 합치면 ‘배(裵)’자인 바, 배극렴이 고려 말 기우는 국운 속에서 백성들에게 얼마나 추앙받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1392년에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어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후에 좌의정)에 이르렀다. 태조 이성계가 세자책봉을 의논할 때에 “시국이 평온할 때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을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가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로 귀양을 갔다. 이후에 이방원이 임금이 된 후 귀양지를 세 번이나 방문했다고 해서 이곳을 ‘삼방리(三訪里)’로, 주변 산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1392년 9월 8일에 67세로 세상을 떴는데, 그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진주목사로 부임해 잣나무를 관아 북쪽에 심어놓고 왕에게 청렴과 검소로 백성을 돌볼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 후 중앙관서의 시중(侍中)이 되자 진주 사람들이 그 나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명명했다. 해마다 송산리에서 4월 5일에 한식제사를 지내고, 출생지인 경북 성주군 성주읍 대황동 사당에서는 음력 9월 7일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