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HOME > 증평의역사 > 증평의 지명

증평읍

논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사곡리 (射谷里)

[ 연혁 ]

사곡리(射谷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사곡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방곡리(芳谷里)ㆍ사청리(射廳里)ㆍ남산리(南山里)ㆍ청룡리(靑龍里)ㆍ내룡리(內龍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자천리(曾子川里) 등 7개리가 있었다. 그 뒤 사곡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근서면(近西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평사리(平沙里)가 상평사리(上平沙里)와 하평사리(下平沙里)로 나뉘었고, 증자천리(曾子川里)가 증천리(曾川里)로 변경됐다. 또한 남산리(南山里)와 청룡리(靑龍里)가 없어지고 궁전리(弓田里)가 새로 생겼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사곡리는 근서면 방곡리(芳谷里)ㆍ사청리(射廳里)ㆍ궁전리(弓田里)ㆍ내룡리(內龍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천리(曾川里)ㆍ명암리(鳴岩里)의 각 일부와 읍내면(邑內面)의 회룡리(回龍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사청리와 방곡리의 이름을 따서 사곡리라 하고, 괴산군 증편면에 편입하였다.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사곡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2년 1월 2일에 주민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지소의 관할구역을 변경할 때, 사곡리는 증천지소에서 장평지소(莊坪支所)로 바뀌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사곡리가 되었다.

[ 유래 ]

사곡리는 1914년에 사청리와 방곡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사곡리는 증평읍사무소에서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증천리ㆍ장동리ㆍ미암리, 도안면 도당리, 괴산군 청안면 청룡리와 접해 있다. 2010년 5월 현재 171세대에 390명이 거주하고 있다.

  • 사곡1리(射谷一里) : ㆍ궁전(弓田) : 사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들 가운데 있다. ‘궁전’은 마을 생김이 활 같이 둥글고, 둥근 활 앞에 밭이 많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그러나 ‘궁전’은 ‘궁밭’에 대한 한자 표기일 가능성이 크다. 전국적으로 ‘궁밭’이나 의미가 비슷한 ‘궁들’ㆍ‘궁뜨리’ㆍ‘궁뜰’ㆍ ‘굼들’ 등는 매우 흔한 지명이다. 여기서 ‘궁’이나 ‘굼’은 ‘금’에서 변한 어형이고, ‘금’은 다시 ‘?’에서 기원한 것이다. ‘?’은 ‘크다’를 뜻한다. 따라서 ‘궁밭’은 ‘큰 밭’으로, ‘금들’ㆍ‘굼들’ㆍ‘궁들’ㆍ‘궁뜨리’ㆍ‘궁뜰’ 등은 모두 ‘큰 들’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궁전’의 ‘궁(弓)’은 ‘궁들’에서의 ‘궁’이 ‘크다’라는 뜻임을 모르고 붙인 음차 표기이다. 물론 ‘전(田)’은 ‘밭’의 훈차 표기이다. 따라서 ‘궁전’ 또한 ‘큰 밭’으로 풀이될 수 있다.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1리 ‘궁골’을 참고하기 바란다.ㆍ외궁(外弓) : ‘궁전’ 바깥쪽[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외궁’은 ‘외’와 ‘궁’으로 나뉘며, ‘궁’은 ‘궁전’ 마을을 뜻한다. 따라서 ‘외궁’은 ‘궁전 마을 바깥쪽’으로 풀이된다.ㆍ질벌/이평(泥坪)/내궁(內弓) : ‘궁전’ 안쪽[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질벌’은 ‘질’과 ‘벌’로 나뉜다. ‘질’은 ‘질그릇을 만드는 흙’을 뜻하니, ‘질벌’은 ‘질그릇을 만드는 흙으로 되어 있는 벌판’으로 풀이된다. ‘이평’은 ‘질벌’에 대한 한자 표기로, 그 뜻은 같다. 이곳은 실제로 땅이 매우 차지다. 따라서 새색시가 시집을 와서 아이 셋을 낳아야 비로소 흙이 떨어진다는 말이 전해온다. 이 마을은 달리 ‘내궁’으로도 불린다. ‘내궁’은 ‘내’와 ‘궁’으로 나뉘며, ‘궁’은 ‘궁전’ 마을을 뜻한다. 따라서 ‘내궁’은 ‘궁전 마을 안쪽’으로 풀이된다.궁전들(弓田-) : ‘궁전’ 앞[남서쪽]에 있는 들이다. ‘궁전들’은 ‘궁전’과 ‘들’로 나뉘며, ‘궁전 마을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남살미들(南-) : ‘질벌’ 남쪽에 있는 들이다. ‘남살미들’은 ‘남’과 ‘살미들’로, ‘살미들’은 다시 ‘살미와’ ‘들’로 나뉜다. ‘살미’는 ‘살’과 ‘미’로 나뉘는데, ‘살’은 지명에서 ‘살미’ㆍ‘살목’ㆍ‘살꾸지’ 등에 쓰여 ‘화살’을 뜻한다. 즉 화살처럼 곧고 길 때 쓰인다. 그리고 ‘미’는 ‘산’을 뜻한다. 그렇다면 ‘남살미들’은 ‘남쪽에 있는, 화살처럼 곧고 긴 산에 붙은 들’로 풀이된다. ‘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 질벌들 : ‘질벌’과 ‘궁전’을 둘러싼 넓은 들판을 가리킨다. ‘질벌들’은 ‘질벌’과 ‘들’로 나뉘며, ‘질벌 마을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박호경 씨[사곡1리 ‘궁전’에 거주]는 2008년 12월에 ‘고품질 쌀 생산 경영평가’에서 ‘장뜰쌀’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최우수농가로 선정되었다.통미산(桶-山)/통뫼산(桶-山) : ‘질벌’ 북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통미산’과 ‘통뫼산’은 ‘통미’ㆍ‘통뫼’와 ‘산’으로, ‘통미’ㆍ‘통뫼’는 다시 ‘통’과 ‘미’ㆍ‘뫼’로 나뉜다. 여기서 ‘통(桶)’은 ‘어떤 물질을 담을 수 있도록 나무ㆍ금속ㆍ플라스틱 등으로 깊이가 있게 만든 물건’을 뜻한다. 지명에서 ‘미’는 ‘메’ㆍ‘모이’ㆍ‘뫼’ㆍ‘매’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산(山)’을 뜻한다. 따라서 ‘통미’ㆍ‘통뫼’는 ‘통을 엎어 놓은 듯 동그랗게 생긴 산’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통미산’ㆍ‘통뫼산’은 고유어인 ‘미’ㆍ‘뫼’의 의미가 불분명해지자, 같은 뜻의 한자어 ‘산’을 중복시킨 유의중복 어형이다. 이 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이 산은 오래 전 장마철에 도안면 송정2리 ‘통미’에서 떠내려 왔는데, 산기슭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남매의 형상이 아닌 데도 ‘남매바위’ 라고 불린다. 옛날 이 바위 근처에 한 채의 집이 있었다. 그 집에는 남매가 있었는데, 매일 바위 위에 올라가서 놀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장에 가서 오라비에게 갖신을 사다 주었다. 아들은 생전 처음으로 갖신을 갖게 된 것에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갖신을 갖지 못한 누이는 아무 말 없이 오라비를 부러워했다. 아버지는 딸아이의 서운함을 눈치 채고 “다음 장날에는 네 갖신도 꼭 사다주마.”하고 약속했다. 이튿날에도 남매는 바위 위에 올라가서 놀았다. 그런데 오라비는 갖신이 닳을까 염려스러워 가지런히 바위 아래 벗어놓고 바위 위에서 흐뭇해하며 갖신을 바라보았다. 그럴수록 누이는 오라비의 갖신이 탐났다. ‘다음 장날에 갖신을 사다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믿었지만?조바심이 나서 한시도 기다릴?수가 없었다. 결국 ‘오라비만 없으면 저 갖신은 내 것이 될 거야.’하며 헛된 생각에 오라비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오라비가 바위 위에서 갖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오라비를 바위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오라비는 바위 밑에 있는 큰 연못에 빠져 그만 숨을 거두었다. 누이는 오라비를 죽이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오라비가 발을 헛디뎌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는 누이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오라비가 죽은 뒤, 한참 후에 바위 밑에서 느닷없이 대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동네 아이들은 대나무를 베어 퉁소를 만들어 불었다. 그런데 퉁소에서 “갖신을 뺏으려고 나를 죽인 누이……. 갖신을 뺏으려고 나를 죽인 누이…….”하며 죽은 오라비의 절규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일로 인해 누이가 오라비를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누이는 자신이 저지른 죄가 무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크게 뉘우쳐 스스로 연못에 몸을 던졌다. 이를 계기로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남매바위’라고 불렀다. 오늘날에 바위 밑에 있었던 큰 연못은 작은 도랑으로 변했지만, 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아직도 생생하게 전승되고 있다. ‘미’ㆍ‘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 사곡2리(射谷二里) :ㆍ사청(射廳)/사칭이[射廳-]/새칭이[射廳-] : ‘궁전’ㆍ‘질벌’ 동쪽에 있고, 충북선 철도 굴다리를 지나면서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사청(射廳)’으로 불리던 곳이다. ‘사청’은 ‘활 쏘는 정자, 즉 사정(射亭)’을 뜻한다. ‘사칭이’는 ‘사청’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의 변화형이다. ‘사청이’가 이모음역행동화에 의해 ‘사쳉이’가 되고, 다시 고모음화에 의해 ‘사칭이’로 실현된 결과이다. ‘새칭이’는 ‘사칭이’의 모음 ‘ㅏ’가 ‘ㅐ’로 변한 어형이다. 따라서 ‘사청’ㆍ‘사칭이’ㆍ‘새칭이’는 모두 같은 뜻으로, ‘활 쏘는 정자[사정]가 있는 곳’으로 풀이된다.ㆍ방아다리/신촌(新村) : ‘사청’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지형이 방아다리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방아다리’는 ‘방아’와 ‘다리’로 나뉜다. 여기서 ‘방아’는 ‘디딜방아’를 뜻한다. 디딜방아는 공이만 빼고 보면 Y자 모양을 하고 있어, 지형이 Y자 모양일 때 이 ‘방아다리’가 사용된다. 디딜방아는 곡식을 빻거나 찧는 데에 쓰이는 기구이다. 지방에 따라 디딜방애ㆍ딸각방아ㆍ발방아ㆍ돈방아ㆍ드딤방아ㆍ드딜방아ㆍ손방아 등으로 부른다. 형태는 Y자 모양으로 자란 자연목의 뿌리 쪽에 공이를 끼운 모양이다. 두 갈래로 된 목 부분에는 아귀진 나무 둘을 양쪽에 세우고[불씨] 그 사이에 굵은 나무를 가로 대어 방아의 받침을 삼는다. 디딜방아는 두 사람이나 네 사람이 발로 디뎌서 공이가 오르내리게 해서 방아를 찧는다. 방아공이는 나무로만 된 것도 있고, 공이 끝이 우툴두툴하게 혹이 달린 쇠통을 끼우거나 혹은 나무공이 중간에 둥근 돌을 단 것도 있다. 또 볼씨로는 통나무를 박거나 네 개의 나무 기둥이나 끝이 아귀진 두 개의 나무 기둥 또는 큰 돌덩이 두 개로 대신하기도 한다. 확으로는 작은 돌절구를 땅에 묻는다. 디딜방아의 부분 명칭은 다음과 같다. 괴밋대는 방아확에서 곡식을 꺼내거나 방아를 쓰지 않을 때 공이를 괴어 놓는 나무를 말한다. 볼씨는 디딜방아나 물방아의 쌀개를 받치기 위해 기둥처럼 박아놓은 나무나 돌을 말한다. 쌀개는 볼씨에 가로 얹혀서 방아를 받치는 나무를 말한다(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 1994: 462). 이 마을은 달리 ‘신촌’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박시미[朴氏-] : ‘방아다리’ 왼쪽[남쪽]에 있는 들로, 산이 둘러싸고 있다. 마을 오른쪽[북쪽]에는 ‘장박골’이 있다. ‘박시미’는 ‘박시’와 ‘미’로 나뉜다. 전국적으로 ‘박실’이란 지명이 매우 많은데, 모두 ‘박(朴) 씨’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박시미’도 ‘박 씨의 산’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미’ㆍ‘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밤실골 : ‘질벌’에서 ‘사청’ 방면으로 철도 굴다리를 지나면서 있는 골짜기이다. ‘밤실골’은 ‘밤실’과 ‘골’로, ‘밤실’은 다시 ‘밤’과 ‘실’로 나뉜다. ‘실’은 ‘골짜기[谷]’를 뜻하는 말로, 아주 이른 시기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다. 得烏一云谷烏(三國遺事 卷 2), 絲浦今蔚州谷浦也(三國遺事 卷 3), 國音谷亦謂之室因俗而名亦從簡也(澤堂集 卷 9 斗室記)여기서 ‘득(得)’은 ‘곡(谷)’에 대응하고, 다시 ‘곡(谷)’은 ‘사(絲)’와 대응되는 바, ‘사(絲)’의 훈은 ‘실’이다. 따라서 ‘득(得)’과 ‘곡(谷)’의 훈도 ‘실’이다. 이처럼 ‘실’은 ‘골’과 유의어로, ‘谷’을 지칭하는데, 골짜기 이름 중에는 ‘석실골’ㆍ‘곰실골’ㆍ‘우리실골’ 등과 같이 ‘실’과 ‘골’의 유의중복 어형도 더러 발견된다. 아마도 후대로 오면서 ‘실’의 의미가 ‘골’보다는 불분명하게 되자, ‘골’을 덧붙여 ‘곡(谷)’의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밤실골’은 유의어 ‘실’과 ‘골’이 반복된 유의중복 어형에 속한다. 그리고 ‘밤이 많이 나는 골짜기’로 해석된다. 이곳은 ‘장박골’ 북쪽으로, 과거 밤나무가 많았다 한다.방아다리골 : ‘방아다리’에서 용강1리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방아다리골’은 ‘방아다리’와 ‘골’로 나뉘며, ‘방아다리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디딜방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사곡2리 ‘방아다리/신촌(新村)’을 참고하기 바란다. 서당골(書堂-) : ‘사청’ 남쪽으로 ‘방아다리’ 가기 전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를 통해 용강1리 ‘내룡’으로 넘어갈 수 있다. ‘서당골’은 ‘서당’과 ‘골’로 나뉘며, ‘서당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옻고개 : ‘사청’과 괴산군 청안면 청룡3리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옻고개’는 ‘옻’과 ‘고개’로 나뉘며, ‘옻나무가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옆으로 새로운 포장농로가 생겨, 이 ‘옻고개’는 도보로만 이용하고 있다.장박골[長-] : ‘방아다리’ 오른쪽[북쪽]에 있는 들이다. 마을 왼쪽[남쪽]에는 ‘박시미’가 있다. ‘장박골’은 ‘장박’과 ‘골’로, ‘장박’은 다시 ‘장’과 ‘박’으로 나뉜다. 여기서 ‘장’은 ‘장(長)’이고, ‘박’은 ‘바위’의 변화형이다. 따라서 ‘장박골’은 ‘긴 바위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절골 : ‘방아다리’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골’은 ‘절’과 ‘골’로 나뉘며, ‘절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 사곡3리(射谷三里) : ㆍ방곡(芳谷) : ‘궁전’에서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1789)에 ‘방곡리(芳谷里)’란 기록이 보인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방곡(芳谷)’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 마을을 ‘방골’로는 부르지 않지만, ‘방곡’은 대부분 ‘방골’과 대응된다. ‘방골’은 ‘방’과 ‘골’로 나뉘며, ‘방같이 아늑한 마을’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 마을은 삼태기 속에 들어앉은 형상으로, 앞쪽[남쪽]만 트이고 삼면이 막혀 있다. 따라서 매우 아늑한 느낌을 준다. ㆍ안골뱅이골[-房-]/작은방곡(-芳谷) : ‘방곡’ 남쪽에 있는 ‘사곡교회’ 일대를 일컫는다. 교회 외에 1가구가 거주한다. ‘안골뱅이골’은 ‘안골방이골’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다. ‘골방이골’은 ‘골방이’와 ‘골’로 나뉘고, ‘골방이’는 ‘골방’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골방’은 ‘큰방 뒤쪽에 딸린 작은 방’을 뜻하니, ‘안골뱅이골’은 ‘안쪽 골방과 같은 골짜기, 즉 큰 골짜기의 뒤쪽에 딸린 작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달리 ‘작은방곡’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방곡에 비해 규모가 작기 때문이다. 벼락배골 : ‘안골뱅이골’ 북쪽으로, 버스승차장 인근을 가리킨다. ‘벼락배골’은 ‘벼락배’와 ‘골’로, ‘벼락배’는 다시 ‘벼락’과 ‘배’로 나뉜다. ‘배’는 ‘바위’의 방언형이다. 지명에서 ‘벼랑’은 매우 다양하게 실현된다. ㉠ ‘바람’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람고지’ㆍ‘바람골’ㆍ‘바람들’ㆍ‘바람말’ㆍ‘바람모팅이’ㆍ‘바람바우’ㆍ‘바람실’ㆍ‘바람재’ 등이 그 예이다. ㉡ ‘바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랑골’ㆍ‘바랑끝’ㆍ‘바랑날’ㆍ‘바랑들’ㆍ‘바랑말’ㆍ‘바랑메’ㆍ‘바랑바구’ㆍ‘바랑배미’ 등이 그 예이다. ㉢ ‘벼루’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루고개’ㆍ‘벼루들’ㆍ‘벼루말’ㆍ‘벼루모탱이’ㆍ‘벼루배미’ㆍ‘벼루재’ 등이 그 예이다. ㉣ ‘벼락’이나 ‘베락’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락산’ㆍ‘벼락고개’ㆍ‘벼락골’ㆍ‘벼락바위’ㆍ‘벼락배미’ㆍ‘베락골’ㆍ‘베락매’ㆍ‘베락바우’ 등이 그 예이다. ㉤ ‘비럭’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비럭골’ㆍ‘비럭굴’ㆍ‘비럭동’ㆍ‘비럭뜸’ㆍ‘비럭바구’ㆍ‘비럭보’ㆍ‘비럭재’ 등이 그 예이다. ㉥ 이밖에’ㆍ‘베루’ㆍ‘베리’ㆍ‘비링이’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베루골’ㆍ‘배루들’ㆍ‘베루메’ㆍ‘베루모퉁이’, ‘베리끝’ㆍ‘베리미’ㆍ‘베리바우’ㆍ‘베리산’ㆍ‘베리재’ㆍ‘비링이들’ 등이 그 예이다. 본 예 ‘벼락배골’은 ‘벼랑 바위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 문화재 ]

사곡리우물(射谷里-) : 사곡2리 ‘사청’에는 우물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우물이 없었다. 그래서 옆 ‘질벌’에서 물을 길어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가뭄이 들라치면 물로 인한 고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가뭄이 심한 때에 한 노승이 이곳으로 시주를 왔다. 가뭄으로 인해 인심이 흉흉한 상황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노승에게 정성껏 시주를 했다. 노승은 ‘가뭄이 심한데도, 또 부촌 같지 않은데도 어찌 이리도 인심이 후할까?’하며 의아해했다. 그러던 중 노승이 목이 말라 한 집에 들러 물 한 모금 마실 것을 부탁했다. 그 집의 안주인은 노승의 부탁에 미안해하며, “마침 집에 길어놓은 물이 없으니 여기 마루에 앉아 계시면 물을 길어다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한 후 동이를 머리에 이고 성급히 나갔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안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웃 마을에서 물을 길어 와야 하는 실정을 몰랐던 노승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에야, 안주인은 “죄송합니다. 우물이 워낙 멀어서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며 쟁반에 물을 공손히 받치며 양해를 구했다. 노승은 이제 마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승은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마을의 물길을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안주인과 더불어 마을 곳곳을 지팡이로 두드리며 한참을 헤매다가 “이곳의 바위를 치우고 우물을 파면 좋은 물이 나올 것입니다.”며 수원(水源)을 점지했다. 그러면서 노승은 “이곳의 우물을 파면 가뭄에도 마르지 않을 것이고, 장마에도 넘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물이 세 번 넘쳐흐르게 되면 말세(末世)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하며 예언과 금기를 동시에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튿날, 안주인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노승이 점지한 장소를 파보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맛좋은 물이 펑펑 솟았다.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물로 인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우물의 물이 넘쳐흐른다.”며 수군댔다. 안주인은 노승의 예언과 금기가 불현듯 생각났다. 분명 난리가 날 것이지만 금기가 있던 터라, 섣불리 마을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안주인은 한참을 고민 하다가, 결국 모든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실제로 난리가 났고, 난리 전에 마을 사람 모두가 피난을 갔다. 그래서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무사히 난리를 극복할 수 있었다. 1910년에 일제가 합병을 했을 때도,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우물물이 넘쳐흘렀다고 한다. 2008년 8월 1일에 충청북도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속칭 ‘말세우물(末世-)’로 통한다. 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과 칠월칠석에 우물을 푸고, 제를 지낸다. 깨끗이 보호하되, 지붕을 해 씌우지 않았다. 이는 하늘과 통해야만 남자들이 죽는 일이 없다는 믿음 때문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