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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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풍요와 평화로운 삶을 바라는 장내마을

남차리 (南次里)

[ 연혁 ]

남차리(南次里)는 본래 조선시대 때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남면에 27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남차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동점리(銅店里)ㆍ장내리(墻內里)ㆍ탄치리(炭峙里) 등 3개리가 있었다. 그 뒤 남차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남면(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남면은 25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장내리(墻內里)가 장천리(長川里)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되며, 덕평리(德坪里)가 새로 생겼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남차리는 남면 동점리(銅店里)ㆍ덕평리(德坪里)ㆍ장천리(長川里)ㆍ탄치리(炭峙里) 일부와 청주군(淸州郡)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월경리(越境里), 청유리(淸油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남차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남차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가 되었다.

[ 유래 ]

남차리란 지명이 어떻게 생성됐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처음 생긴 마을로, 기존의 두 마을 이름을 따지 않고 ‘남차리’라 해서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차리(南次里)는 본래 조선시대 때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 지역에 속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남쪽이란 위치와 관련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남차리는 현재 증평읍사무소의 남쪽에 있다. 2010년 5월 현재 185세대에 379명이 거주하고 있다.

  • 남차1리(南次一里) : ㆍ서당말(書堂-)/서당촌(書堂村) : 신경행묘소 맞은편에 있는 ‘기원사’[절]로 가는 마을이다. ‘서당말(書堂-)’이나 ‘서당촌(書堂村)’은 같은 뜻을 지닌 이름으로, ‘기원사’ 아래 예전에 ‘구계서원’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ㆍ숯고개1/탄치(炭峙)/수현(壽峴) : ‘숯고개2’[고개]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숯고개1’[마을]은 고개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옮겨와 쓰인 예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탄치(炭峙)’로 불리던 곳이다. 이 마을에 묘소가 있는 충익공 신경행(1547∼1623)의 신도비에도 그가 ‘탄현(炭峴)’ 에 묻혀 있다고 했다. 또 『청안현지도(淸安縣地圖)』(1872)에도 남면에 ‘탄치(炭峙)’란 지명이 보이며, 1895년과 1916년 제작된 지도에도 각각 ‘탄현(炭峴)’ 과 ‘탄치(炭峙)’ 가 적혀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炭峙/슛고?’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영산신씨(靈山辛氏) 문중에서 1998년 11월에 세운 ‘영산신씨 수현 충익공파 세거지비’에는 마을이 ‘수(壽)’하는 곳이라 해서 ‘목숨 수(壽)’자, ‘고개 현(峴)’자를 붙여 ‘수현(壽峴)’이라 했다고 적혀 있다. ‘숯고개’는 다시 세 개의 작은 마을로 나뉜다. ‘아랫말’ 또는 ‘하촌(下村)’은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이고, ‘양지말’은 마을회관 북쪽 신경행묘소 근처에 있는 마을이며, ‘윗말’ 또는 ‘상촌(上村)’은 마을회관 위쪽[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개매기 : ‘아랫말’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논이다. ‘개매기’는 ‘개매’와 ‘기’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개매’는 ‘?’에서 변한 말이다. 현대지명에 나타나는 ‘?’ 계 지명은, 가장 흔한 모습이 ‘?>감’에 조음소 ‘아’가 개재된 ‘가마’인데, 때로는 ‘감’ㆍ‘검’ㆍ‘금’ㆍ‘가마’ㆍ‘가매’ㆍ‘고마’ㆍ‘가미’ㆍ‘가무’ㆍ‘개마’ㆍ‘개매’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은 ‘신(神)’이나, 여기서 발전한 ‘크다[大]’를 뜻하게 된다. ‘기’는 일찍부터 ‘己ㆍ只’(*기)의 모습으로 백제 지명에 사용되었다. 悅城縣本百濟悅己縣, 潔城郡本百濟結己郡, 儒城縣本百濟奴斯只縣(三國史記 卷36) 상기 예에서 ‘己ㆍ只’(*기)는 신라 경덕왕이 ‘성(城)’으로 바꾸기 이전의 백제어이다. 또한 ‘己ㆍ只’(*기)는 고구려 지명 ‘忽’(*홀ㆍ*골)과 자매 관계에 있던 것이니, ‘己’와 ‘忽’의 이른 형으로 ‘성(城)’을 뜻하는 ‘溝?’(*구루)를 상정할 수 있다(溝?者句麗名城也(三國志魏志東夷傳), 溝?者句麗城名也(北史高句麗條)). 이 ‘溝?’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忽’은 중부 이북 지역에, ‘己’는 중부 지역에 남은 것이다. 다만, ‘기’는 현대 지명에 쓰이면서 본래 의미인 ‘성(城)’에서 ‘마을이나 골짜기’로 의미변화가 있었다. 그렇다면 ‘개매기’는 ‘가미기[가마기]’와 같은 뜻으로, ‘큰 마을이나골짜기’로 풀이된다.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연탄1리 ‘궁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군맹이고개 : ‘서당말’ 동쪽에 있는 고개로, 괴산군 청안면 문방리 ‘군맹이’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예전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군맹이’로 가는 고개라서 ‘서당말’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20여 년 전에 2차선포장도로가 되었다. 농골 : ‘서당말’ 동쪽, ‘군맹이고개’ 가기 전에 있는 골짜기이다. ‘농골’은 ‘논골’의 연구개음화형이다. ‘논골’은 ‘논’과 ‘골’로 나뉘며, ‘논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동고개(東-) : ‘숯고개1’[마을]에서 율2리 ‘봉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예전에 율2리 ‘봉천리’ 사람들이 학교와 증평장을 다니던 고개이다. ‘동고개’는 ‘동’과 ‘고개’로 나뉘며, ‘동쪽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동고개’는 ‘서고개’와 짝을 이루는 고개이나,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방아바위 : ‘구석산’에 있는 바위이다. ‘방아바위’는 ‘방아’와 ‘바위’로 나뉘며, ‘방아 모양의 바위’로 풀이된다. ‘디딜방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사곡2리 ‘방아다리/신촌(新村)’을 참고하기 바란다. 병풍바위(屛風-) : ‘구석산’ 정상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이다. 바위 모양이 병풍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산소골(山所-) : ‘숯고개1’[마을]의 ‘아랫말’과 ‘양지말’ 사이에 있는 들이다. ‘장골’ 동쪽에 붙어 있다. ‘산소골’은 ‘산소’와 ‘골’로 나뉘며, ‘산소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신경행묘소 등 영산신씨 선산이 있는 골짜기이다. 서고개(西-) : ‘숯고개1’[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로, 예전 ‘구석산’으로 나무하러 다닐 때 넘었다. ‘서고개’는 ‘서’와 ‘고개’로 나뉘며, ‘서쪽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동고개’와 짝을 이룬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서원골(書院-) : ‘숯고개1’[마을] ‘윗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서원골’은 ‘서원’과 ‘골’로 나뉘며, ‘서원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윗말’에서 ‘구계서원’ 터로 가는 곳에 있다. 석유바위[石衣-] : ‘구석산’ 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석유바위’는 ‘석의바위’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석의바위’는 ‘석의’와 ‘바위’로 나뉘는데, ‘석의(石衣)’는 ‘바위에 낀 이끼’를 뜻한다. 따라서 ‘석의바위’나 변화형 ‘석유바위’는 ‘이끼가 낀 바위’로 풀이된다. 숯고개 : ‘숯고개1’[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남차2리 ‘퉁기미’로 가는 길목으로, 2차선포장도로가 되었다. ‘숯고개’는 ‘숯’과 ‘고개’로 나뉘며, ‘숯 굽는 곳 부근의 고개’로 풀이된다. ‘숯고개1’[마을]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수수밭골 : ‘윗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수수밭골’은 ‘수수밭’과 ‘골’로 나뉘며, ‘수수를 심은 밭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아들바위 : 구석산의 ‘석유바위’ 옆에 있는 바위이다. ‘아들바위’는 ‘아들’과 ‘바위’로 나뉘며,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비는 바위’로 풀이된다. 은행나무골(銀杏-) : ‘숯고개1’[마을] 서남쪽, ‘보광정사’[절]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은행나무골’은 ‘은행나무’와 ‘골’로 나뉘며, ‘은행나무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자새골 : ‘양지말’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전국에 ‘자새골’은 몇 예가 확인된다. ‘자새’는 ‘새끼, 참바 따위를 꼬거나 실 따위를 감았다 풀었다 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얼레’를 뜻한다. 그렇다면, ‘자새골’은 지형이 자새 모양으로 생겨서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장들 : ‘숯고개1’[마을]의 ‘아랫말’과 ‘양지말’ 사이에 있는 들이다. ‘산소골’ 서쪽에 붙어 있다. ‘장들’은 ‘장’과 ‘들’로 나뉜다. 여기서 ‘장’은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장’을 ‘장(長)’으로 본다면, ‘장들’은 ‘긴 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장’을 ‘장치기(杖-)’로 본다면, ‘장들’은 ‘장치기를 하는 들’로 풀이된다. ‘장치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장동리 유래’를 참고하기 바란다. 칼바위 : 구석산에 있는 바위이다. ‘칼바위’는 ‘칼’과 ‘바위’로 나뉘며, ‘칼처럼 생긴 바위’로 풀이된다. 이 바위는 실제로 칼날처럼 날카롭게 생겼다.
  • 남차2리(南次二里) :ㆍ강터(姜-) : ‘숯고개1’[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강터’는 ‘강 씨들이 잡은 터’를 뜻한다. 일부 지도 등에 ‘광터’라고 표기돼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ㆍ새터 : ‘강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터’는 ‘새’와 ‘터’로 나뉘며, ‘새로 만들어진 마을’로 풀이된다. ㆍ퉁기미[銅-]/동점(銅店) : ‘강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퉁기미’는 ‘퉁기’와 ‘미’로, ‘퉁기’는 다시 ‘퉁’과 ‘기’로 나뉜다. ‘퉁’은 ‘동(銅)’에 대한 중국음이고, ‘기’는 ‘촌(村’)의 뜻이며, ‘미’는 ‘산(山)’을 뜻한다. 따라서 ‘퉁기미’는 ‘놋그릇을 만드는 산촌 마을’을 뜻한다. 이곳에는 옛날에 놋그릇점이 있었다고 전한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동점리(銅店里)’란 지명이 보인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고유 지명은 없이 ‘銅店’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남차1리 ‘개매기’를, ‘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깨박골 : ‘새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 공동묘지 앞에 있다. ‘깨박골’은 ‘깨밭골’의 연구개음화 어형이다. 즉 ‘깨밭골’이 미파화에 의해 ‘깨받골’로, ‘깨받골’이 다시 연구개음화에 의해 ‘깨박골’로 실현된 것이다. ‘깨밭골’은 ‘깨밭’과 ‘골’로, ‘깨밭’은 다시 ‘깨’와 ‘밭’으로 나뉜다. 따라서 ‘깨밭골’이나 변화형 ‘깨박골’은 ‘깨밭이 많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남차소류지(南次小溜池) : ‘퉁기미’ 북동쪽에 있는 저수지이다. ‘남차소류지’는 ‘남차’와 ‘소류지’로 나뉘며, ‘남차리에 있는 못’으로 풀이된다. 도장골 : ‘남차소류지’ 밑[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도장골’은 ‘도장’과 ‘골’로 나뉜다. 여기서 ‘도장’은 ‘도장방’을 뜻한다. ‘도장방’이란 ‘규방(閨房)’과 같은 말로, 여자들이 거처하는 방이다. 따라서 ‘도장골’은 ‘도장방처럼 아늑한 골짜기’로 풀이할 수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가 안방처럼 아늑한 느낌을 줄 때, 이런 이름이 많이 붙는다. 동점앞들(銅店-) : ‘동점’ 북쪽 들로, 삼기천 가에 있다. ‘동점앞들’은 ‘동점앞’과 ‘들’로, ‘동점앞’은 다시 ‘동점’과 ‘앞’으로 나뉘며, ‘동점 앞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등기미골[銅-] : ‘퉁기미’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등기미골’은 ‘등기미’와 ‘골’로 나뉜다. 여기서 ‘등기미’는 ‘퉁기미’의 변화형이다. 따라서 ‘등기미골’은 ‘퉁기미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등기재골[銅-] : ‘숯고개’와 남차2리 ‘새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등기재골’은 ‘등기재’와 ‘골’로 나뉜다. 여기서 ‘등기재’는 ‘등기미’ 즉 ‘퉁기미’의 변화형이다. 따라서 ‘등기재골’은 ‘퉁기미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사막골(沙幕-) : ‘퉁기미’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전국적으로 ‘사막골’은 ‘사기막골’과 병용되는 예가 많다. 물론 ‘사기막’은 ‘사기를 굽는 사기소’를 뜻한다. 그렇다면 ‘사막골’은 ‘사기막골’에서 ‘기’가 생략된 어형으로, ‘사기를 굽는 사기소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새골창골 : ‘강터’ 부근에 있는 골짜기이다. ‘새골창골’은 ‘새골창’과 ‘골’로, ‘새골창’은 다시 ‘새’와 ‘골창’으로 나뉜다. ‘골창’이나 ‘굴창’은 ‘고랑’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모두 ‘골짜기’에 대한 충청방언형이다. 따라서 ‘새골창골’은 ‘사이에 있는 골짜기’나 ‘새로 생긴 골짜기’로 풀이된다. 같은 뜻을 지닌 ‘골창’과 ‘골’이 겹친 유의중복 어형이다. 엉고개 : ‘퉁기미’ 북쪽에 있는 고개로, 지금은 이용되지 않는다. ‘엉고개’는 ‘엉’과 ‘고개’로 나뉜다. 여기서 ‘엉’은 두 가지로 다르게 풀이된다. 첫째는, ‘엉’을 ‘낭떠러지’의 방언형 ‘엉’으로 보는 견해이다. 따라서 ‘엉고개’는 ‘낭떠러지가 있는 고개’가 된다. 둘째는, ‘엉’을 ‘어은’의 변화형으로 보는 견해이다. ‘어은고개’에서 ‘ㅡ’가 생략되어 ‘언고개’로, ‘언고개’가 연구개음화에 의해 ‘엉고개’로 될 수 있다. 그런데 ‘어은’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어은골’이 대부분 ‘은골’과 함께 쓰임을 볼 때, ‘엉고개’ 또한 ‘은고개’와 대응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엉고개’는 ‘숨은 고개’로 풀이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엉고개’는 그 자체를 원형으로 보아 ‘낭떠러지 고개’로 볼 수도 있고, ‘어은고개’의 변화형으로 보아 ‘숨은 고개’로 볼 수도 있다.엉고개골 : ‘엉고개’ 부근에 있는 골짜기이다. ‘엉고개골’은 ‘엉고개’와 ‘골’로 나뉘며, ‘엉고개 부근의 골짜기’로 풀이된다.
  • 남차3리(南次三里) : ㆍ벌장내/장내/장천(長川)/아랫말 : 남차3리는 4개의 자연마을로 되어 있다. 삼기천(三岐川)을 중심으로 우측에 있는 마을이 ‘벌장내’와 ‘옥녀봉1’[마을]이고, 좌측에 있는 마을이 ‘언덕장내’와 ‘행복마을’이다. ‘벌장내’는 ‘벌’과 ‘장내’로 나뉘며, ‘벌판에 있는 장내’로 풀이된다. ‘언덕장내’와 구별하기 위하여, 벌판에 있는 곳은 ‘벌장내’로 부른 것이다. 이 마을은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장내(墻內)’로 기록되어 있고,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장천(長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고유 지명은 없이 ‘長川’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장내’는 ‘장’과 ‘내’로 나뉜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의 ‘장내(墻內)’라는 기록에 따르면, ‘담 안’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이나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의 ‘장천(長川)’이란 기록에 따르면, ‘긴 내’가 되어야 한다. 이 마을이 삼기천 가에 있음을 주목한다면, 후자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이 마을은 달리 ‘아랫말’로도 불리는데, ‘옥녀봉1’[마을]이 생긴 후 ‘옥녀봉1’[마을]보다 아래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벌장내’는 ‘수살제’를 지내고, ‘언덕장내’는 ‘산제’를 지낸다. ‘장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충주(忠州)에는 매우 인색한 사람이 살았다. 그는 조기를 천장에 달아놓고 쳐다보는 것을 반찬으로 삼을 정도로 심한 자린고비였다. 굴비는 지금도 값비싼 생선이지만, 당시에는 더욱 귀했다. 자린고비는 제사를 지낸 후에 그것을 천장에 달아놓고 쳐다보며 밥을 먹었다. 보는 것도 아까워 딱 한 번씩만 쳐다보았다. 옆에서 밥을 먹던 아들이 혹여 두 번을 쳐다보면, “이 놈아! 한 번만 쳐다봐라. 두 번 쳐다보면 짜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어느 날 여름에 자린고비는 ‘장에 곰팡이가 피지 말라.’고 장독을 열어 햇볕을 쬐였다. 그런데 장 냄새를 맡고 쇠파리가 날아들어 장을 빨았다. 쇠파리는 엄지손가락 굵기 만했는데, 쇠파리의 다리에 장이 덕지덕지 묻었다. 이를 목격한 자린고비는 빗자루를 들고 파리를 쫓았다. 그런데 쇠파리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에 그만 충주에서부터 ‘장내’ 마을 ‘수살거리’까지 한달음에 달려오고 말았다. 그러나 장 냄새는 여기저기서 풍겨 났지만, 쇠파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이에 쇠파리는 없고 장 냄새만 풍겨났다고 해서, 이곳을 ‘장내’라고 일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전설은 글자 그대로 전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ㆍ옥녀봉1(玉女峰一) : ‘벌장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벌장내’에서 홍수가 질 것을 우려하거나 결혼해 분가한 사람들이 ‘옥녀봉2’[산] 부근으로 이사해 만들었다.ㆍ언덕장내/덕평(德坪) : 삼기천을 중심으로 좌측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덕평(德坪)’으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德坪/언덕말’로 기록되어 있다. 두 기록 모두 위의 ‘장천[벌장내]’과 달리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장천’과 별도의 마을을 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원 이름은 ‘언덕말’이고, ‘언덕장내’처럼 ‘장내’를 붙인 이름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언덕장내’를 풀이한다면, ‘언덕으로 되어 있는 장내마을’이 될 것이다. 이 마을은 달리 ‘덕평’으로도 불린다. ‘덕평’은 보통 ‘덕개’ㆍ‘덕거리’ㆍ‘덕고개’ㆍ‘덕곡’ㆍ‘덕동’ㆍ‘덕들’ㆍ‘덕바위’ㆍ‘덕산’ 등에 쓰인 ‘덕’과 같이 ‘큰 덕(德)’으로 보아, ‘큰 들’로 풀이된다. 그러나 본 예는 ‘언덕말’에 대한 한자 표기이니 ‘덕’을 ‘언덕’으로 보아, ‘덕평’을 ‘언덕마을’로 풀이할 수 있다. ‘언덕장내’는 ‘산제’를 지내고, ‘벌장내’는 ‘수살제’를 지낸다. ㆍ행복마을(幸福-) : ‘언덕장내’ 아래[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 10여 호가 거주한다. 이곳은 ‘토골’이란 골짜기였다. ‘토골’은 ‘토’와 ‘골’로 나뉘는데, ‘토’의 뜻이 분명하지 않다. 예전에 홍역이 유행할 때, 애장했던 곳이라 전한다. ‘애장(-葬)’이란 ‘아이의 장례, 즉 아이의 시체를 땅에 묻거나 짚으로 싸서 나무에 얹어 놓는 장례’를 뜻한다. 그렇다면 ‘토골’은 ’터골‘의 변화형으로 보아야 하고, ’터골‘은 ’애장터골‘의 변화형이 아닌가 추정된다. 덕지고개(德地-) : ‘옥녀봉1’[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청원군 북이면 영하리로 가는 길목이나, 지금도 비포장도로이다. ‘덕지고개’는 ‘덕지’와 ‘고개’로 나뉜다. ‘덕’은 지명에 있어 매우 생산적인 전부요소이다. ‘덕고개’를 비롯하여, ‘덕거리’ㆍ‘덕곡’ㆍ‘덕내’ㆍ‘덕다리’ㆍ‘덕대’ㆍ‘덕동’ㆍ‘덕들’ㆍ‘덕바우’ㆍ‘덕밭’ㆍ‘덕산’ㆍ‘덕실’ㆍ‘덕재’ㆍ‘덕티’ 등에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덕’은 대략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크다[大]’로 쓰이고 있으니, 이때의 ‘덕’은 ‘큰 덕[德]’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경남 창녕군 남지읍 학계리의 ‘덕동’은 일명 ‘큰골’로도 불린다. 둘째, ‘깊다[深]’로 쓰이고 있으니, 전남 여수시 돌산읍 서덕리의 ‘덕곡’은 일명 ‘깊은골’로도 불린다. 셋째, ‘터[基]’로 쓰이고 있으니,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의 ‘덕동’은 일명 ‘텃골’로도 불린다. 여기서는 첫째와 관련하여 ‘덕지’를 ‘큰 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덕지고개’은 ‘큰 땅으로 되어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덕지골(德地-) : ‘덕지고개’ 부근의 골짜기이다..아주 후미진 곳이어서 각종 범죄가 발생했다고 한다. ‘덕지골’은 ‘덕지’와 ‘골’로 나뉘며, ‘덕지고개 부근의 골짜기’로 풀이된다. 부처당골(-堂-) : ‘증평저수지’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부처당골’은 ‘부처당’과 ‘골’로 나뉘며, ‘부처당, 즉 불당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산악골 : ‘옥녀봉1’[마을] 남쪽, ‘구녀성’으로 가는 골짜기이다. 중턱에 가면 물이 솟아 나무꾼들이 쉬면서 목을 적셨다고 한다. ‘산악골’은 ‘산악’과 ‘골’로 나뉜다. 여기서 ‘산악’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지명에 흔히 보이는 ‘수녹골’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녹골’은 ‘수녹’과 ‘골’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수녹골’을 비롯하여, ‘수노골’ㆍ‘수놋골’ㆍ‘수누골’ㆍ‘수눅골’ㆍ‘수눗골’ㆍ‘수늣골’이란 지명이 매우 흔하다. 아마도 이들은 ‘고개[嶺]’를 뜻하는 ‘수늙’의 변형이 아닌가 추정한다. 그렇다면 ‘수녹골’이나 ‘산악골’은 ‘고개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성미들(城-) : ‘쟁구쟁이골’ 동쪽으로. ‘쟁구쟁이골’과 붙어 있는 골짜기이다. ‘성미들’은 ‘성미’와 ‘들’로, ‘성미’는 다시 ‘성’과 ‘미’로 나뉜다. ‘미’는 ‘산’을 뜻하니, ‘성미들’은 ‘성이 있는 산 부근의 들’로 풀이된다. ‘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속구레골 : ‘첫구레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삼기천과 닿아 있지 않다. ‘속구레골’은 ‘속구레’와 ‘골’로, ‘속구레’는 다시 ‘속’과 ‘구레’로 나뉜다. ‘구레’는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땅바닥’을 말한다. ‘구레’는 들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데, 때에 따라서는 ‘들’을 덧붙여 ‘구렛들’로도 쓰인다. ‘속구레골’은 ‘구레골 안쪽, 즉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골짜기 안쪽’으로 풀이된다. ‘첫구레골’과 대비적으로 불린 이름이다. 수살거리(水殺-) : ‘벌장내’ 입구이다. 증평 시가지와 초평ㆍ율리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로, 수살이 있어 수살고사를 올리는 곳이다. 본래 암수살은 지금의 위치에 있었고. 수수살은 남차2리 ‘통기미’에서 홍수 때 흘러내려 왔다고 한다. 전설은 다음과 같다. 남차리 앞에는 장내천이라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예전에 장마가 지면 장내천이 범람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제방을 쌓았지만, 피해는 줄지 않았다. 이에 수수살과 암수살을 방위에 맞게 세우고 수살막이 고사를 올렸다. 그랬더니 이후부터 수해가 없었다. 그러나 병자년(丙子年)에 또 한 번 큰 장마가 졌다. 이때 장마는 ‘배나무고개’까지 삼켜버렸다. 장마는 수수살도 삼켜버렸다. 그런데 물에 둥실둥실 떠내려 오던 수수살이 암수살 옆에 이르더니 급한 물살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남성이 여성을 찾아 온 것이니, 이는 천리(天理)로 볼 수 있다.”하며 수수살과 암수살을 양쪽으로 세워놓고 더욱 정성껏 위했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정월 열 나흗날 수살막이 고사를 올리고 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 전날 ‘수살제’ 재현 행사를 여는데, 100여 년 전부터 마을에 닥친 수해를 막기 위해 지냈다고 한다. 행사는 수수살제와 암수살제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남녀 주민으로 나뉘어 풍년과 재난 방지를 기원하는 암수 줄다리기ㆍ지신밝기ㆍ달집태우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펼쳐진다. ‘수살’은 ‘수살막이’ㆍ‘살막이’ㆍ‘수살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시골 동네 어귀에 서 있는 돌이나 나무’를 말한다. 동네를 수호하는 신성한 것으로, 전염병이 유행할 때 새끼줄을 쳐서 모시며 또한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환자의 옷을 걸어 놓기도 한다. 이는 흔히 ‘살방’ㆍ‘수살방’ㆍ‘수살목’ 등의 뜻을 가진 풍수지리상의 비보(裨補)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들바위 : ‘초정고개’에 있던 바위이다. 도로가 2차로로 개설되면서 없어졌다. ‘아들바위’는 ‘이들’과 ‘바위’로 나뉘며,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비는 바위’로 풀이된다. 이 바위는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이 초정약수터로 가면서 돌을 던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오리나무골 : ‘토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오리나무골’은 ‘오리나무’와 ‘골’로 나뉘며, ‘오리나무가 많은 골짜기’로 풀이된다.옥녀봉(玉女峰) : 삼기천 우측에 있는 산이다. 전국적으로 ‘옥녀봉’은 수백 예가 보인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ㆍ‘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ㆍ‘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명당’이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공통적인 점은 ‘옥녀봉’이란 이름이 산 모양이 매우 단아하고 수려할 때 붙여진다는 점이다. 이 산에는 전설이 전한다. 이곳에는 길손의 목을 적셔주는 노주(露酒)가 나오는 ‘술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술바위’에서는 한 사람 앞에 한 잔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한 잔을 마신 사람이 아무리 잔을 갖다 대어도 술은 절대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술을 한 잔 마시게 되었다. 어찌나 술맛이 좋던지, 스님은 한 잔의 술을 더 마시고 싶은 마음에 단장으로 ‘술바위’를 쑤셨다. 그래도 술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술바위’에서는 더 이상 술이 나오지 않았고, 지금은 땅 속에 묻혀 버렸다.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술바위’가 있던 길은 경상도에서 보은ㆍ미원을 거쳐 진천ㆍ서울로 가는 큰 길목이었다. 이 산 부근에 ‘옥녀봉1’[마을]이 들어서 있다. 장비쟁이 : ‘행복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장(張) 씨 성을 가진 비쟁이[비서관]가 살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 풀이가 신빙성을 지니지는 못하지만, 전국에 ‘장비쟁이’는 본 예가 유일한 것이므로 달리 풀이할 근거가 없다. 쟁구쟁이골 : ‘언덕장내’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쟁구쟁이골’은 ‘장구쟁이골’의 변화형으로, ‘장구처럼 잘록한 모양의 골짜기’로 풀이된다. 참샘골 : ‘옥녀봉1’[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참샘골’은 ‘찬샘골’의 변화형이다. ‘찬샘골’은 ‘찬샘’과 ‘골’로, ‘찬샘’은 다시 ‘찬’과 ‘샘’으로 나뉜다. 따라서 ‘찬샘골’이나 변화형 ‘참샘골’은 ‘찬 샘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여기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옥이 몇 채가 있었고, 마을상수원이 있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해 일할 때 막걸리 통을 갖다 놨다고 한다. 현재는 1가구가 남아 이 물을 식수로 이용한다. 첫구레골 : 남차3리노인정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삼기천에 닿아 있다. ‘첫구레골’은 ‘첫구레’와 ‘골’로, ‘첫구레’는 다시 ‘첫’과 ‘구레’로 나뉜다. ‘구레’는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땅바닥’을 말한다. ‘구레’는 들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데, 때에 따라서는 ‘들’을 덧붙여 ‘구렛들’로도 쓰인다. ‘첫구레골’은 ‘첫째 구레골, 즉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첫째 골짜기’로 풀이된다. ‘속구레골’과 대비적으로 불린 이름이다. 초정고개(椒井-) : ‘초정골’에 있는 고개로, 남차3리와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의 경계를 이룬다. ‘초정고개’은 ‘초정’과 ‘고개’로 나뉘며, ‘초정으로 가는 고개’로 풀이된다. 현재는 2차선포장도로가 되었다. 초정골(椒井-) : 남차3리경로당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초정고개’와 이어진다. ‘초정골’은 ‘초정’과 ‘골’로 나뉘며, ‘초정으로 가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 문화재 ]

ㆍ구계서원지(龜溪書院址) : 구계서원(龜溪書院)은 남차1리에 세웠던 서원으로, 광해군 5년(1613)에 현감 조인행(趙仁行)과 신경행(辛景行) 등이 인근의 사람들에게 통문을 보내, 청안현감과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낸 서사원(徐思遠), 보령현감을 역임한 이득윤의 스승 박지화(朴枝華), 괴산현감을 지낸 이득윤(李得胤)을 배향하였다. 그 후 현종 7년(1666)에는 송시열의 문인 황처검(黃處儉) 등이 사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다시 이준경(李浚慶)과 헌릉참봉을 지낸 이당(李塘)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때 송시열에게 문의해 위치를 정하였는데, 이준경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서사원ㆍ박지화ㆍ이득윤ㆍ이당을 차례로 배향했다. 숙종 5년(1679)에는 현감 남한명(南漢明)이 상량문과 서원기 및 고적 사실을 써서 걸었으나,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없어지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은 당시 소론(小論)과 남인(南人)이 중심이 되어 영조(英祖)와 노론(老論)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모반사건이다. 이인좌는 경기도와 경상도 등 여러 지역의 선비들과 난을 모의했으며, 이들은 상여를 가장해 그 안에 무기를 숨기고 ‘수름재’를 거쳐 청주로 들어가 청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주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군과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도안을 비롯한 청안 일대가 이들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때 곡산연씨 가문의 연세홍(延世鴻)ㆍ연수창(延壽昌)은 의병을 모아 이인좌의 무리들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연수창은 상당산성의 적을 물리쳐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사족(士族)들은 소론계도 있었지만, 노론계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계서원’은 고종 6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지금은 초석만 남아있다. 구계서원 터는 증평군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이준경]이준경(李浚慶, 1499∼157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원길(原吉)이고, 호는 동고(東皐)이다.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의 아들이며, 한성부 동부 연화방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는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죽음을 당했다. 이때 연좌되어 아버지, 형 이윤경과 함께 6살의 나이로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 그 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그는 외할아버지 신승연과 황효헌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연경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중종 26년(1531)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에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해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서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들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에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장령ㆍ홍문관직제학ㆍ부제학으로 승진하였고, 그 후 성균관대사성ㆍ형조참판ㆍ병조판서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550년 정적이었던 영의정 이기(李?)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는 1555년에 을묘왜란을 물리쳐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하였으며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1567년 하성군 균(鈞)을 선조로 즉위시키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는데, 이때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趙光祖) 등과 을사사화로 처벌을 받은 모든 사림들을 신원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 등 신진사림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동고유고(東?遺稿)』와 『조선풍속(朝鮮風俗)』등이 있다.[박지화]박지화(朴枝華, 1513∼1592)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수암(守庵)이다. 서경덕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여 유ㆍ불ㆍ선 등에 통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죽었다. 그의 가문은 고조 때 청주로 이주하였고, 그는 이득윤에게 역학 등을 가르치는 등 후진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후에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로는『수암유고(守庵遺稿)』ㆍ『사례집설(四禮集說)』등이 있다.[서사원]서사원(徐思遠, 1550∼1615)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달성이다. 자는 행보(行甫)이고, 호는 악재(樂齋)이다. 전교 서흡(徐洽)의 아들이며, 큰아버지인 서형(徐泂)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이황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였고,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과 찰방을 지냈다. 선조 28년(1594년)에 청안현감으로 부임하여 연충수 등과 함께 향교를 정비하고 학사(學舍)에서 사림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 후 1597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하였으며,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ㆍ호조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과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악재집(樂齋集)』이 있다.[이득윤]이득윤(李得胤, 1553∼1603)은 조선 중기의 역학자이자 악인(樂人)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극흠(克欽)이고, 호는 서계(西溪)이다. 고려 말의 문신 이제현의 후손으로, 청원군 옥화동(玉華洞)에 거주하였다. 그는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근처에 살던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을 배웠고, 선조 21년(1588)에 진사가 되었다. 1597년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왕자사부가와 형조좌랑ㆍ의성현령을 지냈다. 그는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해 고향에 머무르면서 선영 옆에 정사(精舍)를 짓고 완역재(玩易齋)라고 하였다. 김장생(金長生)ㆍ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 거문고에 관련된 것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라는 거문고악보를 남겼다. 그는 인조반정 후 선공감정(繕工監正)이 되었고, 이듬해 괴산군수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서계집』 등이 있으며, 특히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는 『안상금보(安常琴譜)』ㆍ『조성금보(趙晟琴譜)』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이당]이당(李塘, 1567∼1644)은 본관이 고성이고, 자는 진언(縝彦)이다. 청안현 남쪽 군방촌(群芳村)에 거주하였다. 선조 39년(1606)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광해조에 국가기강이 문란해지자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후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더욱 힘써 인근사림들이 모여들어 경내의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났다. 이득윤ㆍ황후천(黃朽淺) 등 여러 선비들과 친하게 사귀었고, 주역과 춘추를 강학하였다. 만년에 스스로 방촌거사(芳村居士)라고 불렀고, 현종 7년(1666)에 구계서원에 추가로 배향되었다.ㆍ신경행묘소(辛景行墓所) 및 신도비(神道碑) : 남차1리 ‘숯고개’의 영산신씨(靈山辛氏) 묘역에 있는 신경행의 묘소 및 신도비이다. 비 전면에는 ‘증예조판서영성군공신도비(增禮曹判書靈城君公神道碑)’라고 써 있다.신경행(辛景行: 1547∼1618)은 본관이 영산(靈山)이다. 자는 백도(伯道)고, 호는 조은(釣隱)이며,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조선 선조 6년(1573) 사마시에 합격했고, 선조 10년(1577)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이 공으로 선조 26년(1593) 한산군수(韓山郡守)가 되었다. 선조 29년(1596) 이몽학(李夢學)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 3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공주목사(公州牧使)ㆍ서흥부사(瑞興府使)ㆍ장흥부사(長興府使)ㆍ병조참의(兵曹參議)ㆍ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의 정3품)ㆍ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으며, 선조 41년(1608)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종2품 무관)에 이르렀다. 이후 청안에 낙향해 조은정(釣隱亭)과 운수정(雲水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다가 77세로 숨졌다. 예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묘지 입구 좌측에는 1992년에 영산신씨 후손들이 청연사(淸然祠)를 지어 봉향하고 있다. 사묘(祠廟)의 건물 구조는 정면 3칸ㆍ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둘레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7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신경행묘소 및 신도비는 2004년 9월 17일에 충청북도기념물 제132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