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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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두타산에서 북동쪽에 자리잡은 마을

연촌리 (硯村里)

[ 연혁 ]

연촌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북면(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북면에 33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연촌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연치리(硯峙里)이다. 그 뒤 연촌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북면(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서도 당시 청안군 북면은 33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점촌리(店村里)가 새로 생겼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안면(道安面)은 7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연촌리는 북면 연치리(硯峙里)ㆍ점촌(店村)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연치리와 점촌의 이름을 따서 연촌리라 하고, 괴산군 도안면에 편입하였다.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되고, 동년 11월 17일에 법률 제8호 「지방 행정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ㆍ공포됨에 따라 괴산군 도안면 연촌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도안면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연촌리는 도안지소(道安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도안면 연촌리가 되었다.

[ 유래 ]

연촌리는 1914년에 연치리(硯峙里)와 점촌(店村)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도안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노암4리와 ‘괴정저수지’를 지나 ‘베루재’[고개]를 넘으면 바로 연촌리다. 연촌리는 1985년에 ‘원남저수지’가 완공되면서 마을과 도안초등학교연촌분교 등이 수몰되었다. 이로 인하여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도안ㆍ증평ㆍ청주 등지로 떠났으나, 최근 다시 마을이 형성되었다. 연촌리는 동쪽으로 석곡리ㆍ송정리와, 서쪽은 진천군 초평면과, 남쪽은 노암리와, 북쪽은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연촌리는 두타산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수몰되기 전에는 벼루를 만들었다. 1920년대 초반에 충남 보령시 웅천면에서 남포벼루를 만들었던 신철우가 박성규에게 벼루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였다. 그 이후 박성규가 1945년에 타계하기까지 계속해서 벼루를 만들었으며, 그 기술은 아들인 박흠익과 친구인 진천군 초평면 황골에 사는 김인수에게 전해졌다. 박흠익은 현재 벼루를 만들고 있지 않다. 1대 벼루장 박성규에게 기술을 전수 받은 김인수는 타계하였고, 그 기술은 유길훈에게 이어져 진천군 초평면 신통리에서 2000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는 유길훈도 개인 사정으로 벼루를 만들지 않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14세대에 27명이 거주하고 있다. ㆍ연촌리 : ‘원남저수지’ 남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있는 곳은 ‘명당배골’이다. ‘명당배골’은 ‘명당배’와 ‘골’로, ‘명당배’는 다시 ‘명당’과 ‘배’로 나뉜다. 여기서 ‘배’는 ‘바위’의 방언형이다. 따라서 ‘명당배골’은 ‘바위가 있는 썩 좋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과거 마을인 ‘바깥베루재’와 ‘안베루재’는 1988년 ‘원남저수지’ 축조로 인해 수몰되었다. 괴너미골 : ‘원남저수지’ 남쪽 끝에 붙어 있는 골짜기로, ‘원남저수지’에서 송정1리 ‘입장’으로 가는 길목이다. ‘괴너미골’은 ‘괴너미’와 ‘골’로 나뉜다. ‘괴’는 ‘고양이’를 뜻하니, ‘괴너미골’은 ‘고양이가 넘어다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현재도 남아 있다. 굴고개 : ‘바깥베루재’ 서남쪽에 있는 고개로,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로 갈 때 넘었다. ‘굴고개’는 ‘굴’과 ‘고개’로 나뉘며, ‘굴로 된 고개’로 풀이된다. 옛날에 나무가 울창하여 마치 굴속을 가는 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현재도 비포장소로로 남아 있다. 바깥베루재/외연(外硯) : 과거 연촌리는 ‘베루재’로 불렀는데, 이는 노암4리와의 경계에 있는 ‘베루재’[고개]로 인해 붙은 이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베루재’[마을]를 ‘연치(硯峙)’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硯峙/베루?’로 기록하고 있다. ‘베루재’는 ‘배나무고개’를 중심으로, ‘안베루재’와 ‘바깥베루재’로 나뉘었다. ‘바깥베루재’는 ‘베루재’[마을] 중 바깥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바깥베루재’는 달리 ‘외연’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바깥베루재’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바깥베루재’와 ‘안베루재’는 ‘원남저수지’로 인하여 수몰되었다. ‘베루재’[고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노암4리 ‘베루재’를 참고하기 바란다. 배나무고개 : ‘바깥베루재’ 북쪽에 있는 고개로, ‘안베루재’로 갈 때 넘었다. 이 고개는 ‘괴너미골’에 있으면서, 고갯마루에 돌배나무 12그루가 있어 ‘나무고개’로 불렸다. 현재도 남아 있다. 안베루재/내연(內硯) : ‘안베루재’는 ‘베루재’[마을] 중 안쪽에 있던 마을이다. 달리 ‘내연’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안베루재’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연촌리에서 가장 컸던 마을이다. 연촌소류지(硯村小溜池) : ‘안베루재’ 동쪽, ‘괴너미골’ 안쪽에 있는 못이다. 1966년에 축조되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연촌소류지’는 ‘연촌’과 ‘소류지’로 나뉘며, ‘연촌리에 있는 못’으로 풀이된다. 움터골 : ‘원남저수지’ 남쪽 끝에 붙어 있는 골짜기로, ‘원남저수지’에서 음성군 원남면으로 가는 길목이다. ‘움터골’은 ‘움터’와 ‘골’로, ‘움터’는 다시 ‘움’과 ‘터’로 나뉜다. 여기서 ‘움’은 ‘움막’을 뜻한다. 따라서 ‘움터골’은 ‘움막 터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움막’은 ‘땅을 파고 위를 거적 같은 것으로 덮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을 피하거나 하는 곳’을 뜻한다. ‘움터골’은 원남저수지에 포함되지 않고, 현재도 남아 있다. 원남저수지(遠南貯水池)/원남지(遠南池) :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助村里)ㆍ진천군 초평면 신통리(新通里)ㆍ증평군 도안면 연촌리(硯村里)에 걸쳐 있는 저수지이다. 농업용수개발사업의 하나로 조성한 대규모 저수지로, ‘원남지(遠南池)’라고도 한다. 1982년 착공하여 1988년 완공하였다. 총 면적 135만 3,000㎡이고, 만수 면적은 114.4㏊이다. 유역 면적은 3,655ha이고, 수혜 면적은 1,080ha이며, 총 저수량은 879만t이다. 현재 괴산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저수지의 일부인 62만 8,567㎡는 2005년 12월에 개인에게 임대하여 유료 낚시터로 전환하였다. 물이 차고 수심이 깊어 손맛을 즐기려는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이 저수지로 인하여 연촌리 대부분이 수몰되었다. 점촌(店村) : 예전 ‘바깥베루재’와 ‘안베루재’ 부근에 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점촌(店村)’으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店村/즘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14년에 ‘연치리(硯峙里: 바깥베루재ㆍ안베루재)’와 ‘점촌(店村)’이 합쳐 ‘연촌리’가 되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현재는 ‘원남저수지’ 축조로 인해 수몰되었다. ‘점촌’은 ‘사기점이나 옹기점이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 창배양달 : ‘바깥베루재’에서 두타산으로 이르는, 남향으로 된 산비탈이다.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와 경계를 이루는데, 전에는 잡목이 우거졌으나 지금은 낙엽송으로 바뀌었다. 영구리 박씨들의 종산으로, 현재도 남아 있다. ‘창배양달’은 ‘창배’와 ‘양달’로, ‘창배’는 다시 ‘창’과 ‘배’로 나뉜다. 여기서 ‘창’은 ‘창(槍)’이나 ‘창(倉)’을, ‘배’는 ‘바위’를 뜻한다. 따라서 ‘창배’는 ‘창처럼 뾰족한 바위’, ‘창처럼 구멍이 나 있는 바위’, ‘창고가 있는 바위’, ‘창고처럼 생긴 바위’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창배양달’도 이와 관련된 양달로 풀이해야 한다. 큰골 : ‘원남저수지’에서 두타산으로 오르는 골짜기이다. ‘큰골’은 ‘큰’과 ‘골’로 나뉘며, ‘큰 골짜기’로 풀이된다.

[ 문화재 ]

ㆍ연촌리산성(硯村里山城) : ‘연촌리산성’은 두타산에 있는 테뫼식 토축산성이다. 고문헌 기록에는 없으나 일제 때의 조사 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도안면 연촌리에 있는 산성(山城)이다. 충북지방비(忠北地方費)로 조성한 모범림(模範林)이 있으며, 돌로 쌓은(石築) 산성으로, 괴산ㆍ진천 2군에 걸쳐 있다. 둘레는 약 500칸이고 높이는 4척(尺)이며 50%가 파괴되어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의 『전국유적목록』과 『문화유적총람』에도 같은 내용이 간략하게 서술되었다. 이 산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600m이고, 높이가 1.2m이며, 폭3m라고 하는데 현재는 거의 붕괴되었다. ㆍ연촌리고인돌(硯村里-) : 연촌리에 있던 고인돌이다. 현재는 ‘원남저수지’에 수몰되어 그 모양과 크기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