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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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곡산연씨 연민회에 의해 처음 이루어진 마을

광덕리 (光德里)

[ 연혁 ]

석곡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북면(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북면에 33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석곡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광암리(廣巖里)?백곡리(柏谷里)?지곡리(池谷里)?석화리(石花里)?진암상리(鎭巖上里)?진암하리(鎭巖下里) 등 6개리가 있었다. 그 뒤 석곡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동면(東面)?남면(南面)?북면(北面)?서면(西面)?근서면(近西面)중에서 북면(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서도 당시 청안군 북면은 33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광암리(廣巖里)가 광암리(光岩里)로 바뀌었으며, 진암상리(鎭巖上里), 진암하리(鎭巖下里)가 진암리(鎭岩里)로 합쳐졌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안면(道安面)은 7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석곡리는 북면 광암리(光岩里)?백곡리(栢谷里)?지곡리(池谷里)?석화리(石花里)?진암리(鎭岩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석화리와 백곡리의 이름을 따서 석곡리라 하고, 괴산군 도안면에 편입하였다.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되고, 동년 11월 17일에 법률 제8호 「지방 행정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ㆍ공포됨에 따라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도안면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석곡리는 도안지소(道安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가 되었다.

[ 유래 ]

송정리는 1914년에 칠송리(七松里)의 ‘송(松)’자와 소강정리의 ‘정(亭)’자를 따서 만들었다. 송정리는 도안면의 제일 북단 음성군 경계와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2010년 5월 현재 168세대에 380명이 거주하고 있다. 석곡리는 1914년에 석화리(石花里)의 ‘석(石)’자와 백곡리의 ‘곡(谷)’자를 따서 만들었다. 석곡리는 도안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충북선 철도와 36번국도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99세대에 212명이 거주하고 있다. (1) 석곡1리(石谷一里) ?석화리(石花里)/돌꼬지 : ‘석화리’는 도안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36번국도 우측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모두에 ‘석화리(石花里)’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石花/돌고?’로 기록되어 있다. ‘석화리’는 달리 ‘돌꼬지’로도 불린다. ‘석화리’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한다. 하나는 옛날 어느 도사가 마을 앞을 지나면서 ‘산정’에서 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저 논 가운데 있는 바위에 꽃이 피는 날이 올 거요. 그러면 마을이 화목해 질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 도사가 간 뒤 다음 해에 바위에 꽃이 피었다. 다른 하나는 옛날 마을 어귀에 바위 두 개가 있었는데, 이 바위에 꽃이 피었다. 마침 충청도관찰사가 이 마을 앞을 지나다 바위에 핀 꽃을 보고 사연을 물으니, 연세화(延世華)라는 분이 돌아가신 후부터 바위에 꽃이 피었다고 하였다. 이에 관찰사가 직접 연세화의 묘소에 참배하고 마을 이름을 ‘석화(石花)’라 명명하였다. 연세화는 진사로, 청안에 사마소(司馬所)를 설치하였던 근동의 대학자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설과 관련된 바위를 볼 수가 없다. 새마을운동의 과정에서 문암천을 직선으로 정비하며 바위가 땅에 묻힌 것이다. 그러나 ‘돌꼬지’는 매우 흔한 지명이다. ‘돌꼬지’는 ‘돌꽂’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편의상 후부요소 ‘꽂’의 어원부터 풀어 본다. ‘꽂’은 ‘곶’이 변한 어형이다. ‘곶’은 원래 ‘바다나 호수로 뾰족하게 내민 땅[串?岬]’을 뜻한다. 그러나 이 ‘곶’이 지명에 사용될 경우, 원래 의미와의 관련 아래 ‘들판 쪽으로 산등성이가 쭉 뻗어 나온 곳’을 뜻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전부요소 ‘돌’의 어원을 풀어 본다. ‘돌’은 여러 가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첫째, ‘돌[石]’로 풀이할 수 있다. ‘돌[石]’은 지명의 선행요소로 빈번히 사용되는 바, 전국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돌고개’?‘돌다리’?‘돌담’?‘돌들’ 등이 그 예이다. 둘째, ‘들[野]’로 풀이할 수 있다. ‘들’이 변하여 ‘달’로 나타나기도 하는 바, ‘달곶’?‘달구지’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달’은 때로 ‘돌’로 교체되어 ‘돌곶’?‘돌고지’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셋째, ‘돌다[回]’의 어간으로 풀이할 수 있다. ‘돌모랭이’?‘돌목’에서와 같이 ‘돌’은 ‘돌다[回]’의 뜻으로 지명에 사용된다. 이 마을에는 바위가 있었다는 전언에 따르면, ‘돌꼬지’는 첫째와 관련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돌꼬지’는 ‘들판 쪽으로 산등성이가 쭉 뻗어 나온, 바위가 잇는 곳’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돌꼬지’는 한자로는 ‘석화(石花)’로 표기된다. ‘돌꼬지’의 ‘돌’을 ‘石’으로, ‘꼬지’를 ‘花’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기는 문제가 있다. ‘돌’을 ‘돌[石]’로 보아 ‘石’으로 옮긴 것은 마땅하나, ‘꼬지’가 ‘곶’이 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음이 유사한 ‘꽃’으로 보아 ‘花’로 옮긴 것은 마땅하지 않다. 따라서 한자로 표기하려면 ‘石串’?‘石岬’이 옳을 것 같다. ‘곶’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용강2리 ‘꽃산구링이’를 참고하기 바란다. ?뒷골/후동(後洞) : ‘돌꼬지’ 뒤에 있는 마을이다. ‘돌꼬지’에서 왼편으로 난 작은 농로를 따라 언덕을 오르면 석곡1리마을회관이 있다. 이 마을회관 뒤편으로 부채 살처럼 형성된 마을이 ‘뒷골’이다. ‘뒷골’은 ‘뒤쪽에 있는 마을’로 풀이되며, 달리 ‘후동’으로도 불린다. 이 마을은 ‘돌꼬지’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해 만들었다. ‘뒷골’은 언덕 너머에 있는 ‘산우물’과 밀접하게 연관된 마을로, 실제 거의 붙어 있다. ?산우물(山-)/산정(山井) : ‘도안농공단지’ 남쪽으로, 애국지사 연병호 선생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산우물’이나 한자어 이름 ‘산정’은 ‘산에 있는 우물’로 풀이된다. 이 마을 이름과 관련된 우물이 연병호 선생 기념관 가장자리에 두 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연병호 선생의 생가 뒷산 아래 있는 ‘옻샘’이다. 이 샘은 지금도 물이 솟아나 샘을 이루고 있지만 기념관 건립을 위해 오염돼 있어 실제 이용하지는 못 하고 있다. 예전에는 식수와 빨래터로 이용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네모난 돌을 지게로 져와 빨래판으로 썼다고 한다. 특히 이 우물은 유난히 차가워 무더운 여름철 땀띠가 나더라도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하면 금방 나았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옻샘’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샘은 ‘오도샘’이라고 불리는데, 현재는 석곡1리 상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상수원 관정을 파고 그 위를 콘크리트로 덮어놓아 본래 모습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이 샘 역시 ‘옻샘’과 마찬가지로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산우물’에는 ‘산정향학당(山井鄕學堂)’이 있었다. 이 향학당은 ‘산우물’의 연병규 선생이 중국에서 연경대학을 나온 후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1930년 무렵 고향에 세운 학당이다. 여기에는 장호원에서 온 서상현(徐相鉉)이라는 분이 함께 하였다. 특히 장호원교회에서 지원을 받아 공책 등을 무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연병규 선생이 1932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미루어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 학당은 당시 일본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연병규 선생의 네 형제분[연병환?연병호?연병규?연병시]이 모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는데, 그 중 한 분이 귀국하여 학당을 차림으로 인해 특별한 감시와 방해가 있었던 것이다. 학당이 문을 닫은 것도 일본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책을 모아놓고 불태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석곡1리마을회관 근처로 추정되는데, 사흘간이나 책을 불태웠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은 이 책의 주인이 서상현 선생이었는지 아니면 항일운동을 하던 연병규 선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당시 학당에서는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지금 마을 어른들이 기억하는 부분은 “거츤산 골짜기로 …… 나아가는 …… 우리는 조선의 꽃 …….” 정도이다. 학당이 문을 닫고 서상현 선생은 다시 장호원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며, 이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장호원에서 들어와 천주교를 전도하면서 학당을 열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학당을 열고 조선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노래를 가르쳤던 것으로 미루어, 1930년대 교육과 농민계몽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지식인으로 추측된다. 특히 독립 운동가였던 연병규 선생과 함께 학당을 열었던 것으로 미루어 민족주의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당시 부르던 ‘산정향학당가(山井鄕學堂歌)’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녹수청산 깊은 골에 잠자던 산우물 태평양을 가고져 주야 흐르네 학생들아 학생들아 하나둘씩 적수성대 성공함은 우리에 있네 우리의 언문도 자꾸 배우면 언젠가는 햇빛도 비춰 주리라. [2절] 학생들아 학생들아 떼를 지어 노래 부르세 아름다운 목소리 기쁜 마음에 고함소리 높이하여 용감스럽게 나라를 사랑하여 같이 부르면 만세소리 곳곳마다 메아리치네 천지를 진동하며 메아리치네. 연병규 선생은 한말 궁내부부경(宮內府副卿)을 지낸 연채우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계방(啓芳)?호는 몽향(蒙香)으로, 경술국치를 당하자 14세의 나이로 부인에게 가사를 맡기고 큰 형님인 연병환이 있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연경대학을 졸업한 후 망명한 동포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며 애국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중국인을 상대로 조선과 중국은 공동운명이라는 공동운명론(共同運命論)을 주장하여 중국의 도움을 끌어들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포를 모아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대한동맹회(新大韓同盟會)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후 국내의 연락을 맡아 북경?천진?남경?상해?만주 등지를 돌아다녔으며,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1930년대 국내에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는 일이 독립운동의 첩경이라 여겨 산정에 ‘산정향학당(山井鄕學堂)’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니 평생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 1932년에는 다시 중국에 돌아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해방 후에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너럿골 : ‘돌꼬지’와 석곡2리 ‘턱골’ 사이에 있는 들로, 매우 넓다. ‘너럿골’은 ‘너러’와 ‘골’이 사이시옷으로 연결된 어형이다. ‘너러’는 ‘널’의 변화형이다. 즉 ‘널’에 ‘어’가 덧붙어 확장된 어형이다. 따라서 ‘너럿골’은 ‘너러골’로, ‘너러골’은 다시 ‘널골’로 소급된다. 여기서 ‘널’은 ‘넓다’의 어간 ‘넓’의 변화형이다. 따라서 ‘널골’이나 변화형 ‘너러골’?‘너럿골’은 ‘넓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논돌 : ‘돌꼬지’ 앞 논 가운데 있는 자연석이다. ‘논돌’은 ‘논’과 ‘돌’로 나뉘며, ‘논에 있는 돌’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 논에는 2개의 돌이 서 있는데, 여름철에는 강아지풀로 인해 바위가 가린다. 데내기/데기들 : ‘돌꼬지’ 서북쪽과 ‘산우물’ 서쪽으로 펼쳐진 논이다. 들 가운데로 문암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쪽은 ‘안데내기/안데기들’, 서쪽은 ‘바깥데내기/바깥데기들’로 불린다. 예전에는 서리 피해가 많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되내기’는 ‘된서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데기들’은 ‘데내기들’의 준말로, 그 뜻은 ‘데내기’와 같다. 뒷골우물 : ‘종지붕’에서 ‘뒷골’로 내려가는 중간에 밭이 있는데, 밭 가장자리에 우물이 있다. 이 우물 또한 연규용?연연권 선생의 7대조 할머니 안동권씨가 팠다고 한다. 안동권씨는 이 우물의 물을 길어 밥을 짓고 ‘종지붕’에 올라 100일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축원 때문인지 이 집안은 대대로 자손이 번성하였다. 지금의 우물 모습은 뒤편에 콘크리트 석벽을 직각으로 세우고, 그 아래 직사각형으로 정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1978년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우물을 방형으로 개수한 것이다. 본래는 논둑 옆에 원형이었다고 한다. 처음 물이 나오지 않는 곳에 우물을 판 것은 아니고, 물이 솟아 흐르는 곳을 골라 우물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뒷골우물’을 비롯하여, ‘산우물’에도 천연의 샘이 두 곳 더 있다. 이로 보아 ‘뒷골’과 ‘산우물’ 일대는 지하수가 천연적으로 솟아오르는 곳인 듯하다. 이 샘은 ‘뒷골’의 식수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산우물’에 있는 ‘오도샘’에 관정을 파 석곡1리의 식수로 사용하고 이 물은 이용하지 않는다. 백토재(白土-) : ‘돌꼬지’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흙빛이 희다. ‘백토재’는 ‘백토’와 ‘재’로 나뉘며, ‘백토 즉, 흰 흙으로 되어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버드나무 : 도안의 대학자인 연규용 선생과 대효자인 연연권(延連權) 선생 형제의 6대조가 심은 나무이다. 처음에는 구불구불하게 흐르던 문암천 가에 심었는데, 새마을사업으로 하천을 곧게 정비하면서 지금은 석곡1리 ‘돌꼬지’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두 선생의 7대조는 본래 청원군 미원(米阮)에 살았다. 7대조가 돌아가시자, 부인 안동권씨는 돈 천 냥만을 지닌 채 아들 한 명을 데리고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이 심은 나무가 버드나무이다. 마을의 노인들은 이 나무의 수령을 3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무를 심은 조상의 세대를 추산한 것이다. 그러나 심을 당시에도 큰 나무의 중간을 잘라 심었다고 전하니 수령은 더 오래 되었을 것이다. 이 버드나무는 원래 더 굵고 컸었는데, 한 길 정도 땅을 돋우면서 나무 밑동이 묻혔다. 연규용 선생은 한학으로 인근에서 이름이 높았던 분이다. 따라서 인근의 공부하던 사람들은 모두 이 분을 찾아 배웠다고 한다. 연연권 선생은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어머니 안동권씨가 주마담[골수염]에 걸려 위급할 때, 고름을 입으로 빨아 3년을 더 사시게 했다고 전한다. 석화공동묘지(石花共同墓地) : ‘돌꼬지’ 남쪽, 석곡리 산27번지 ‘해남들’에 붙어 있는 공동묘지이다. ‘석화공동묘지’는 ‘석화리에 있는 공동묘지’로 풀이된다. 오도샘[梧桐-] : ‘산우물’ 연병호 선생 생가 부근에 있는 샘이다. ‘오도샘’은 ‘오도’와 ‘샘’으로 나뉜다. 지명에서 ‘오도’는 ‘머구섬’과 병용되는 예가 많다. 여기서 ‘머구’는 ‘머귀나무[梧桐]’를 뜻한다. 그렇다면 ‘오도샘’도 ‘오동샘’의 변화형으로 추정되며, ‘오동나무가 있는 샘’으로 풀이된다. 종지붕(鍾-)/산지붕(山-) : 연규용?연연권 선생의 집안은 손이 귀했다. 7대조 할머니 안동권씨는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자손이 번성하라고 ‘종지붕’을 만들고 우물을 팠다고 한다. 종손인 연규용 선생 댁 뒷산 정상에 마치 아기 무덤처럼 흙무더기를 쌓아 만든 것이 ‘종지붕’이다. ‘종지붕’은 ‘종 모양의 지붕’이라는 뜻이다. 달리 ‘산지붕’으로도 부르는데, 이는 ‘산 모양의 지붕’이라는 뜻이다. ‘종지붕’은 세월이 흘러 허물어지고 깎이자 연연권 선생이 다시 흙을 돋웠다고 한다. 지모골[池-] : ‘돌꼬지’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지모골’은 ‘지모’와 ‘골’로 나뉜다. 여기서 ‘지모’의 어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지못(池-)’의 변화형이 아닌지 추정할 뿐이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이유는 이 골짜기에는 예전에 크고 작은 샘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청룡(靑龍) : ‘돌꼬지’와 ‘석화공동묘지’ 언저리에 있는 밭으로, 성황당과 몇 백 년 묵은 괴목이 있었다. 이 괴목에 청룡이 나타난다고 믿어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그러나 ‘청룡’은 주로 ‘주산(主山)에서 뻗어나간 왼쪽 산줄기’를 가리킨다. 풍수지리상으로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청룡날’ 또는 ‘청룡뿌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 예 ‘청룡’은 ‘마을 왼쪽 산줄기에 있는 밭’으로 추정된다. (2) 석곡2리(石谷二里) ?반용골(蟠龍-)/반용동(蟠龍洞)/바람골/바랑골/풍동(風洞) : ‘반용골’은 도안면의 가장 동쪽에 있으며, 사리면 방축리?진흥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도안면 소재지에서 괴산으로 가는 34번국도로 가다보면 왼편으로 석곡2리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에서 왼편으로 흐르는 보강천을 따라 둑길이 사리면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다. 300m 정도를 가면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두 갈래 길이 있다. 오른쪽 길은 ‘반용골’로, 곧게 난 길은 ‘양짓말’과 ‘턱골’로 가는 길이다. 이 마을은 ‘반용골’?‘반용동’?‘바람골’?‘바랑골’?‘풍동(風洞)’ 등 다양하게 불린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본래는 ‘반용골’?‘반용동’으로, 주변 지세가 용이 서려 있는 형세를 하여 붙은 것으로 본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하여 ‘바람골’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랑골’을 기본 지명으로 삼아 어원을 풀이해야 한다. 전국에 ‘바랑골’은 매우 많다. 그런데 ‘바랑’은 몇 가지로 다르게 해석된다. 첫째는 ‘바랑’을 ‘중이 등에 지고 다니는 자루 같은 주머니’로 보아, ‘바랑처럼 생긴 골짜기’로 풀이한다. 둘째는 ‘바랑’을 ‘바른’의 변화형으로 보아, ‘지형이 바른 골짜기’로 풀이한다. 셋째는 ‘바랑’을 ‘바람[風]’의 변화형으로 보아, ‘바람이 센 골짜기’로 풀이한다. 넷째는 ‘벼랑’으로 보아, ‘벼랑으로 된 골짜기’로 풀이한다. 이 중 특히 넷째 풀이에 관점을 맞춰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지명에서 ‘벼랑’은 매우 다양하게 실현된다. ㉠ ‘바람’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람고지’?‘바람골’?‘바람들’?‘바람말’?‘바람모팅이’?‘바람바우’?‘바람실’?‘바람재’ 등이 그 예이다. ㉡ ‘바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랑골’?‘바랑끝’?‘바랑날’?‘바랑들’?‘바랑말’?‘바랑메’?‘바랑바구’?‘바랑배미’ 등이 그 예이다. ㉢ ‘벼루’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루고개’?‘벼루들’?‘벼루말’?‘벼루모탱이’?‘벼루배미’?‘벼루재’ 등이 그 예이다. ㉣ ‘벼락’이나 ‘베락’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락산’?‘벼락고개’?‘벼락골’?‘벼락바위’?‘벼락배미’?‘베락골’?‘베락매’?‘베락바우’ 등이 그 예이다. ㉤ ‘비럭’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비럭골’?‘비럭굴’?‘비럭동’?‘비럭뜸’?‘비럭바구’?‘비럭보’?‘비럭재’ 등이 그 예이다. ㉥ 이밖에도 ‘베루’?‘베리’?‘비링이’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베루골’?‘배루들’?‘베루메’?‘베루모퉁이’, ‘베리끝’?‘베리미’?‘베리바우’?‘베리산’?‘베리재’?‘비링이들’ 등이 그 예이다. 본 예 ‘바랑골’은 넷째의 해석대로 ‘벼랑으로 되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바람골’도 그 뜻은 ‘바랑골’과 같다. 실제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光岩/바람골’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달리 한자어 이름은 ‘풍동(風洞)’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바랑’이나 ‘바람’이 ‘벼랑’의 뜻인지 모르고 ‘바람 풍(風)’을 붙인 이름이다. 또한 ‘반용골’이나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반용동’ 또한 ‘바랑골’의 변화형으로 보여진다. 이 마을은 앞으로는 보강천이 흐르고, 너머로는 넓게 펼쳐진 논이 있다. 지형상 특별히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할 수는 없다. 마을 옆으로는 야산을 넘어가는 소로가 보인다. 지금은 마을 외곽으로 길이 잘 뚫렸지만 예전에는 사리면에서 도안면으로 오가는 길이었다. 야산을 뒤로하고 형성된 집들은 많지는 않지만 석곡2리에서는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이다. 또 길목에 자리하여 과거 석곡2리의 중심마을이었다. ‘반용골’은 대부분 곡산연씨들이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대략 300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곡산연씨 금당파 연세견(延世堅)은 당시 가선대부행지중추부사(嘉善大夫行知中樞府事)였는데, 그의 묘가 ‘반지울’에 있다. 어디에서 이거했는지 전하지 않으나 ‘울어바위’ 곡산연씨 세거지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양짓말/양촌(陽村) : 화성3리 상작마을회관에서 충북선 철도와 36번국도를 지나 1.3km 거리에 있는, 양지바른 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이다. 친환경농촌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보강천 다리를 건너 곧게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아벨정밀’이라는 공장이 나온다. 이 공장을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곧게 뻗은 농로는 사리면으로 가는 포장도로와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논이 길게 이어져 있다. 이 논 너머로 나지막한 야산이 ‘반산’이다. 이 ‘반산’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 ‘양짓말’과 ‘턱골’이다. ‘양짓말’은 한자어 이름인 ‘양촌’으로도 불린다. ?턱골/백곡(柏谷) : ‘양짓말’ 바로 뒤에 있는 마을로, 석곡2리마을회관이 있다. 마을의 집들은 대체로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마을의 위치가 앞으로 보강천을 두고 뒤로 야트막한 야산을 두어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백곡리(柏谷里)’로 나타난다. ‘턱골’은 텃골의 변화형이다. ‘텃골’이 미파화에 의해 ‘턷골’로, 다시 연구개음화에 의해 ‘턱골’로 실현된 것이다. ‘텃골’은 ‘터’와 ‘골’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으로, ‘마을 터’를 뜻한다. 지명에 따라서는, 한자로 옮겨 ‘기동(基洞)’으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栢谷/터골’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달리 ‘백곡’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잣나무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턱골’과 ‘양짓말’은 예전부터 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옛날부터 왕래가 많았으며, 일상생활에서 협동이 잘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마을들은 현재 행정구역상 석곡2리로 묶여 있으며, 과거에는 석곡1리 ‘석화’와는 별도로 ‘백곡(栢谷)’을 구성하였다. ‘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신동1리 ‘아랫장터/새텃말’을 참고하기 바란다. ?반지울(盤地-)/반주월[盤地-] : ‘턱골’ 북쪽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로, ‘돌꼬지’와 가깝다. 과거에는 서너 집이 있었으나 현재는 단 한 집만이 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반지울’은 ‘반지’와 ‘울’로 나뉜다. ‘반지’는 ‘반지(盤地)’로 ‘소반처럼 평평하고 밋밋한 땅’을, ‘울’은 ‘골’을 뜻한다. 따라서 ‘반지울’은 ‘소반처럼 평평하고 밋밋한 땅으로 된 마을’로 풀이된다. 달리 ‘반지월’로도 불리는데, 이는 ‘반지울’의 변화형이다. 가마골 : ‘턱골’에서 동쪽으로 있는 들판을 건너 석화공동묘지가 있는 골짜기다. ‘가마골’은 ‘가마’와 ‘골’로 나뉜다. 여기서 가마는 ‘?’과 관련된 말이다. ‘?’은 상대(上代)의 신앙?정신면과 관련되는 바, ‘크다[大]’를 뜻하게 된다. 따라서 ‘가마골’은 ‘큰 골짜기’로 풀이된다.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1리 ‘궁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농정(農亭) : ‘턱골’로 넘어가는 오솔길과 ‘양짓말’로 들어가는 갈림길에 있는 정자이다. 이 정자는 몇 년 전에 석곡2리청년회에서 세운 것으로, 들일을 하며 더러는 쉬고 더러는 새참을 먹기 위해 만든 농정(農亭)이다. 그 필요성 때문에 그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마을 입구에 자리하여 아담한 풍취가 한적한 여유를 준다. 위로 오르면 ‘턱골’이고, 아래로 내려가면 ‘반용골’인 갈림길에 자리하여 누구나 쉬어갈 수 있다. 산수가 빼어난 곳에 자리하여 몇몇 사람들만의 전유물로서의 정자가 아니라, 고단한 삶에서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여유를 줄 수 있는 ‘농정’이기에 더욱 반갑다. 동안들(洞-) : ‘반용골’과 ‘양짓말’ 사이에 있는 들이다. ‘동안들’은 ‘동안(洞-)’과 ‘들’로 나뉘며, ‘마을 안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마룻들 : ‘턱골’ 동쪽에 있는 들이다. ‘마루’와 ‘들’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이다. ‘마루’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으니, ‘고(高)’를 뜻하는 백제어 ‘毛良’[*모랑]이나 중세국어 ‘??[宗]’와 관련된다. 지명에서 ‘마루’는 ‘마루’ 외에 ‘말’?‘마리’?‘말양’?‘말랑’?‘말랑이’?‘날망’으로 나타나는데, ‘평지보다 약간 높으면서 평평한 곳’을 가리킨다. 또한 ‘마루’는 후부요소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요소로도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물론 이때에도 ‘약간 높고 평평한’이란 의미는 그대로 들어 있다. 이상의 설명에 따르면, ‘마룻들’은 ‘약간 높고 평평란 들’로 풀이된다. ‘마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3리 ‘쇠마루/금헌(金軒)/새터’를 참고하기 바란다. 반산(盤山) : ‘반지울’ 뒤[북쪽]에 있는 산이다. ‘반산’은 곡산연씨(谷山延氏)의 선대의 산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반산’은 ‘반’과 ‘산’으로 나뉜다. ‘반’은 ‘소반(小盤)’을 뜻한다. 따라서 ‘반산’은 ‘소반처럼 평평하고 밋밋한 산’으로 풀이된다. 삼사골 : ‘텃논들’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삼사골’은 ‘삼사’와 ‘골’로 나뉜다. 여기서 ‘삼사’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지명에 따라서는 ‘세 명의 진사’와 관련되기도 하고, ‘세 절’과 관련되기도 한다. 삼성 : ‘양짓말’ 서쪽, ‘백토재’ 너머에 연해 있는 밭이다. 전국적으로 ‘삼성’이 붙은 지명은 수없이 많은데, 관련된 유래담이 확실하지 않다. 일례로 ‘삼성산’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많은 곳에서 ‘삼싱산’?‘삼승산’?‘삼성산’?‘삼신산’과 병용된다. 이로 볼 때, ‘삼신산’이 최초의 어형이고, ‘삼성산’?‘삼승산’?‘삼싱산’은 이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어형 ‘삼신산’에서의 ‘삼신’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세상에서 아기의 많고 적음과 있고 없음, 그리고 해산을 주관하는 신’을 말한다. ‘삼신할머니’ 또는 ‘산신(産神)’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삼성산’는 ‘삼신당이 있는 산’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본 예 ‘삼성’도 ‘삼신’의 변화형으로 보아, ‘삼신당이 있는 곳’ 정도로 풀이된다. ‘삼신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내성1리 ‘삼성당[-堂]/삼성댕이[-堂-]’를 참고하기 바란다. 석곡들(石谷-) : ‘옻나무들’ 북쪽, 문암천 가에 있는 들이다. ‘석곡들’은 ‘석곡’과 ‘들’로 나뉘며, ‘석곡리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옻나무들 : ‘삼사골’ 남쪽, ‘동안들’ 서쪽에 있는 들이다. ‘옻나무들’은 ‘옻나무’와 ‘들’로 나뉘며, ‘옻나무가 많은 들’로 풀이된다. 용당들(龍塘-) : ‘턱골’ 앞에 있는 들이다. ‘용당’은 ‘용당(龍塘)’으로, ‘용이 승천한 못’을 뜻한다. 따라서 ‘용당들’은 ‘용이 승천한 못 근방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마을 앞 연못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전한다. 용대들(龍垈-) : ‘반지울’ 동쪽에 붙어 있는 들이다. ‘용대들’은 ‘용대’와 ‘들’로 나뉜다. ‘용대’는 ‘용터’에 대한 한자지명으로, ‘용처럼 길게 생긴 터’를 뜻한다. 들이 용처럼 길게 생겼을 때 ‘용대들’이 붙는다. 진지바위 : ‘반용골’ 동북쪽, 괴산군 사리면 ‘진암(鎭岩)’과의 경계에 있는 바위이다. 일제강점기에 ‘진담제방’을 축조하였는데, 이 바위를 깨서 쓰려고 징을 대자 바위가 울었다 전한다. 텃논들 : ‘양짓말’ 앞에 있는 논이다. ‘텃논들’은 ‘텃논’과 ‘들’로 나뉜다. ‘텃논’은 ‘집터에 딸리거나 마을 가까이에 있는 논’을 뜻하니, ‘텃논들’은 ‘집터에 딸리거나 마을 가까이에 있는 논으로 되어 있는 들’로 풀이된다. 해남들 : 도안면소재지에서 ‘양짓말’로 가는 보강천 주변의 들이다. ‘옻나무들’ 남쪽에 있다. 보강천과 문암천을 끼고 발달된 들이다. ‘해남들’은 ‘해남’과 ‘들’로 나뉜다. 여기서 ‘해남’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지명에 따라서는 ‘해남’이 ‘홰나무’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해남’은 ‘홰나무’의 변화형이고, ‘해남들’은 ‘홰나무가 있는 들’로 풀이된다. 해남보(-洑) : ‘해남들’에 있는 보이다. ‘해남보’는 ‘해남’과 ‘보’로 나뉘며, ‘해남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보’로 풀이된다.

[ 문화재 ]

연병호생가(延秉昊生家) : 독립지사 연병호 생가는 석곡1리 ‘산우물’ 555번지에 있다. 1910년 음력 2월 13일에 초가집으로 건립되었다가, 1986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그를 제향하는 ‘명덕정사(明德精祠)’가 건립되어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그의 생가는 애국지사연병호선생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유지들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2002년 1월11일에 충청북도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연병호(延秉昊: 1894~1963)는 고종 31년(1894) 11월 22일에 도안면 석곡1리 ‘산우물’에서 연채우와 전주이씨의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에 개명하기 전까지 연병준(延秉俊)이란 이름을 썼으며, 자는 순서(舜瑞)?호는 원명(圓明)이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때에는 맏형인 연병환(延秉煥)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자 그 뒤를 따라 망명해 만주?난징?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에 상해임시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와 임시정부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이병철?나창헌?안재흥?조용주 등과 함께 비밀 항일운동 단체인 청년외교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29일에 간부 18명과 함께 일경에 적발되어 대구 감옥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이름을 연병호로 개명하고 북경에서 독립혁명당(獨立革命黨)을 조직했으며, 1922년에 안창호?여운형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해 활동하였고,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1937년 1월에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 만주에 있는 일본관동군의 조선인 선무공작대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가혹한 고문으로 사경의 몸이 된 채 조선총독부로 인계되어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대전과 공주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한국독립당 창당을 발기해 중앙위원 겸 훈련부장을 지냈으며, 1948년 5월에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 기초위원, 외무국방위원으로 활약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 1950년에 국회의원에 재선되었으며, 그 후 문교위원으로 『광복운동사』 편찬을 역설하여 실현시켰다. 괴산수력발전소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준공을 보기도 하였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쳐 온 그는 1963년 1월 26일에 70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는 그해 3월 1일에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했다.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등 독립지사와 주민들의 애도 속에 고향인 도안면 석곡리 선영에 묻혔다가, 1976년 10월에 국립묘지 이범석의 묘 옆으로 이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