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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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지역교통의 중심지

신동리 (新洞里)

[ 연혁 ]

신동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신동리는 법정마을로 분리되기 전에는 증평리에 속했다. 증평리는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충청북도증평출장소가 설치될 때에는 증천지소 관할이었다. 그 후 신동리는 2002년 1월 2일에 증평리에서 분리되어 법정리가 되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신동리가 되었다.

[ 유래 ]

신동리는 중동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중동리ㆍ창동리ㆍ초중리 등과 인접해 있다. 2002년 1월 2일에 증평리에 분리되어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따라서 신동리는 ‘새로 생긴 마을’을 뜻하는 ‘새터말’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이 마을은 달리 ‘신동(新洞)’ 또는 ‘새터말’로도 불린다. 현재 증평군선거관리위원회가 자리하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1,234세대에 2,845명이 거주하고 있다.

  • 신동1리(新洞一里) : 아랫장뜰/새텃말 : 장동1리 일대, 특히 ‘신궁전웨딩홀[구 증평읍사무소 자리]’와 현 괴산경찰서증평지구대가 있던 곳을 ‘윗장뜰’이라 했고, 신동1리를 ‘아랫장뜰’ 또는 ‘새텃말’로 불렀다. ‘아랫장뜰’은 ‘아래’와 ‘장뜰’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으로, ‘아래에 있는 장뜰’로 풀이된다. ‘새텃말’은 ‘새터’와 ‘말’이 사이시옷으로 연결된 어형이다. ‘새터’는 ‘새’와 ‘터’로 나뉜다. ‘터’는 일찍부터 지명에 쓰였으니, 고구려 지명에서 ‘제(?)’와 대응되는 ‘吐’ㆍ‘刀’(*토)가 보인다. 漆?縣本漆吐縣, 大城郡本仇刀城境內(三國史記 卷 34), 奈?郡本高句麗 奈吐郡, ?上縣本高句麗吐上縣, 長?郡本高句麗主夫吐郡, ?(一作棟)?縣 本高句麗束吐縣(三國史記 卷 35), 奈吐郡一云大提(三國史記 卷 37)현대 지명에서도 ‘터’는 매우 생산적인 후부요소로, 한자로는 ‘대(垈)’가 대응된다. 또한 ‘터’ 외에 ‘태’ㆍ‘테’ㆍ‘퇴’ㆍ‘때’ㆍ‘턱’으로도 보인다. 의미 영역도 터 이름 외에 마을ㆍ들ㆍ골ㆍ산 이름에 전용되고 있으며, 특히 마을 이름이 가장 많다. 본 예 ‘새텃말’은 ‘새로운 터에 생긴 마을’로 풀이된다. 그리고 ‘신동’은 ‘새텃말’에 대한 한자지명이다. 이 마을은 달리 ‘아랫장뜰’로도 불린다. ‘아랫장뜰’은 ‘아래’와 ‘장뜰’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으로, ‘아래에 있는 장뜰’로 풀이된다. 신동리는 군청에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신동1리는 개인주택 단지로 되어 있다. ‘장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장동리의 유래’를 참고하기 바란다.
  • 신동2리 : 삼보맨션과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아리랑고개 : 현재 증평역 옆쪽에 있던 고개로, 지금은 주택지가 되었다. 일제 때 젊은 이들은 대부분 광산으로 강제 징용되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노인과 아녀자들이 배급으로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아이들은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이곳에 주로 묻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통곡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따라서 붙은 이름이 ??아리랑고개??이다. 또한 6ㆍ25 사변 이후 1ㆍ4후퇴 때에는 주민들이 방공호를 파고 피신한 곳이 ??아리랑고개??이다. ‘아리랑고개’에서 후부요소(後部要素) ‘고개’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와 백제 지명에 ‘영(嶺)’ㆍ‘현(峴)’계 지명이 다수 발견됨을 볼 때,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三嶺縣本高句麗三峴縣, 文登縣本高句麗文峴縣, 竹嶺縣本高句麗竹峴縣(三國史記 卷 35), 鎭嶺縣本百濟眞峴縣(三國史記 卷 36)지명에서, 이 ‘고개’계 지명은 대단히 생산적인데, ‘고개’ㆍ‘오개’ 뿐만 아니라 ‘재’ㆍ‘영(嶺)’ㆍ‘치(峙)’ㆍ‘현(峴)’도 빈번히 사용된다. 이들 중 ‘치(峙)’는 ‘티’로도 나타나는데 ‘티’가 월등히 많다. 그리고 이들은 고개 이름에 주로 붙지만, 마을을 포함한 기타 지명으로도 전용되고 있다. 또 이들 간에는 유의중복 어형이 발견된다. ‘꽃재고개’ㆍ‘병마재고개’ㆍ‘산막재고개’ㆍ‘장판재고개’ㆍ‘족박재고개’ㆍ‘진재고개’ 등은 ‘재’와 ‘고개’가, ‘달티고개’ㆍ‘말티고개’ㆍ‘메리치고개’ㆍ‘살티고개’ㆍ‘삽티고개’ㆍ‘새티고개’ㆍ‘시어티고개’ㆍ‘열티고개’ㆍ‘염티고개’ㆍ‘이티고개’ 등은 ‘티’와 ‘고개’가, ‘삼령고개(三嶺-)’는 ‘영(‘嶺)’과 ‘고개’가 중복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재’ㆍ‘티’ㆍ‘영(嶺)’ 등은 ‘고개’라는 본래의 뜻이 약화되었고, 이를 보강하기 위해 유의어 ‘고개’를 중복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놀치재’ㆍ‘수티재’ㆍ‘이티재’ 등은 ‘치’와 ‘재’가 중복되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고개’를 뜻하는 지명의 후부요소는, 사용 빈도 면에서나 유의중복 면에서 ‘영(嶺)ㆍ현(峴)ㆍ치(峙)(재→고개’의 순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 한자어보다는 고유어가, 고유어 중에서도 ‘고개’가 가장 우세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옹기골(甕器-) : 현재 ‘삼보맨션’ 옆 산등성이로, 과거 옹기를 굽던 골짜기이다. 아이들이 군대놀이를 하던 곳이다. ‘옹기골’은 ‘옹기’와 ‘골’로 나뉜다. ‘골’은 지명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후부요소로, 그 기원은 두 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고구려어 ‘홀(忽)’과의 관련이다. 이 ‘홀(忽)’은 『삼국사기』에 48례가 보이는데, 그 중 1례만이 백제 지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구려 지명이다.陰城縣本高句麗仍忽縣, 白城郡本高句麗奈兮忽, 赤城縣本高句麗沙伏忽, 水城郡本高句麗買忽郡, 高城郡本高句麗達忽, 野城郡本高句麗也尸忽郡(三國史記 卷 35), 峰城縣一云述爾忽縣, ?城郡一云加阿忽, 母城郡一云也次忽, 淺城縣一云比烈忽, 漢城郡一云漢忽(三國史記 卷 37) ‘홀(忽)’은 중국중고음(中國中古音)과 동음(東音)을 고려해 볼 때, ‘*홀’ㆍ‘*골’로 재구할 수 있다. 이렇게 재구된 고구려어 ‘홀(忽)’은 신라어 ‘火ㆍ伐’(*불)이나 백제어 ‘夫里’(*부리)와 동계어로, ‘성(城)’ㆍ‘동(洞)’을 의미한다. 『용비어천가』에 보이는 ‘골’계 지명은 대부분 ‘동(洞)’과 대응되고 있다. 따라서 ‘홀(忽)’에서 출발한 ‘골’이 15세기에는 이미 후부요소로서 확고한 위치를 ?지했음을 알 수 있다.加莫洞 가막골(용 1: 39), 滓甕洞 ??골(용 1: 49), 北泉洞 뒷??(용 2: 32), 防薔洞 마근담?(용 5: 27), ??洞 다대골(용 5: 33), 答相谷 답샹골(용 5: 34), 舍音洞 ??골(용 5: 34), 蛇洞 ?얌골(용 1: 43), 兎兒洞 투?골(용 7: 53), 所磨洞 설멧골(용 9: 28), 楸洞 ?래올(용 10: 19), 묏고래 수머겨샤(석 6: 4), 고? ??? 구루미(滿谷雲)(杜초 8: 51), 즈믄 바회와 萬골왜(萬壑)(南明下 27), 골 곡(谷)(字會上 3), 골 동(洞) 골 곡(谷)(類合上 5)그러나 『용비어천가』를 포함하여 중세국어에 보이는 모든 ‘골’이 ‘홀(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는 신라어 ‘*??[郡ㆍ村]’에 소급하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문헌 예로는 ‘栗村 조??(용 2: 22)’이나 ‘스?? 軍馬? 이길?(克彼鄕兵)(용 5: 31)’에 보이는 ‘조??’ㆍ‘스??’이 최고형(最古形)이고, 이는 ‘??)?올→고을→골’의 과정으로 변화하였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현대 지명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골’계 지명은 ‘성(城)’ㆍ‘동(洞)’을 뜻하는 고구려어 ‘忽’(*홀ㆍ골)에서 비롯된 것과, ‘군(郡)’ㆍ‘촌(村)’을 뜻하는 신라어 ‘*??’에서 비롯된 것이 섞여 있다. 따라서 그 기원을 정확히 구분해 내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지명에서 ‘골’계 지명은 ‘굴’ㆍ‘꼴’ㆍ‘꿀’ㆍ‘골짝’ㆍ‘골짜기’ㆍ‘굴멍’ㆍ‘울’ㆍ‘월’ㆍ‘고리’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중 ‘굴멍’은 ‘골’에 대한 충청 방언이요, ‘고리’는 ‘골’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 신동3리(新洞三里) : 신동3리 : 상아아파트ㆍ해동연립과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네모방죽/사가방죽[四角-] : 현재 ‘해동연립’ 자리에 있던 방죽이다. 삼보초등학교로 가는 길목에 있어 학생들에게 위험한 관계로,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했었다. ‘네모방죽’은 ‘네모’와 ‘방죽’으로 나뉜다. ‘방죽’은 ‘파거나 둑으로 둘러막은 곳’을 말한다. 방죽 모양이 네모져서 ‘네모방죽’으로 불렸고, ‘네모방죽’을 한자로 표기하여 ‘사각방죽(四角-)’이라 한 것인데 이것이 변하여 ‘사가방죽’이 되었다. 증평역(曾坪驛) : 중동3리에 있는 충북선 기차역이다. 1939년에 세워서 ‘청안역’이라 하였다가 ‘증평역’으로 고치고 1980년 9월 10일에 복선화되었다.
  • 신동4리(新洞四里) : 주공아파트단지로 되어 있다.
  • 신동5리(新洞四里) : 주공3차아파트단지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