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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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증평읍의 도시화의 한가운데 서 있는 마을

장동리(莊洞里)

[ 연혁 ]

장동리는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의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장동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삼성리(三省里)ㆍ내동상리(內洞上里)ㆍ내동하리(內洞下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자천리(曾子川里) 등 5개리이다. 그 뒤 장동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어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근서면(近西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내동상리(內洞上里)와 내동하리(內洞下里)는 내상리(內上里)로 합쳐졌으며, 증자천리(曾子川里)는 증천리(曾川里)로 바뀌었고, 장평리(莊坪里)ㆍ안합리(安合里)가 새로 생겼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증평리는 근서면의 장평리(壯坪里)ㆍ삼성리(三省里)ㆍ안합리(安合里)ㆍ내상리(內上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천리(曾川里) 일부와 남면의 금반리(金盤里)ㆍ둔덕리(屯德里) 일부와 청주군(淸州郡)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초중리(楚中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壯坪里)의 이름을 따서 증평리(曾坪里)라 하고, 괴산군(槐山郡) 증평면(曾坪面)에 편입하였다. 당시 증평리는 증평면 소재지였다.1949년 8월 13일에 대통령령 제156호에 의하여 증평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괴산군 증평읍(曾坪邑) 증평리가 되었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1912년경에 새로 생긴 마을 장평리는 1914년 이후에는 괴산군 증평면 증평리에 속하면서,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충청북도증평출장소가 설치될 때에는 증천지소 관할이었다. 그러다가 2002년 1월 2일에 증평리에서 장동리(莊洞里)라는 법정리로 분리되어 장평지소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장동리가 되었다.

[ 유래 ]

장동리는 1912년경의 ‘장평리’가 분리 독립된 마을이다. ‘장평’은 1912년경에는 ‘莊坪’으로, 1914년 표기에는 ‘壯坪’으로,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는 壯坪으로 나타난다. 18세기 중엽 황윤석의 여행기에 진천 근처 ‘장평(長坪)’을 경유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장평’이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장평리(莊坪里)가 1912년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면 둘의 연관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이 ‘장평’에 대한 고유 지명은 ‘장뜰’이다. ‘장뜰’의 ‘뜰’은 ‘장’과 ‘들’이 합성될 때, ‘들’이 경음화한 어형이다. 여기서 ‘장’의 어원이 분명하지 않다. 한글학회(1970)의 『한국지명총람(충청북도편)』, 충청북도(1987)의 『지명지(地名誌)』, 괴산군(1990)의 『괴산군지』 등에는 전에 나무꾼들이 장을 치던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이곳이 과거에 시장이 있어 붙은 이름으로 보기도 하며, 증평군지편찬위원회(2005: 285)는 이 지역의 들판이 넓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이곳에 시장(市場)이 들어선 것은 1923년 5월 1에일 충북선 열차가 개통 된 이후의 일이다. ‘넓은 들’이란 의미 또한 해석에 어려운 점이 있다. 한자어 ‘장(長)’이 고유어 ‘들’과 결합되는 것은 어색한 조어법이고, ‘넓은 들’이 아닌 ‘긴 들’ 또한 이곳 지형과 맞지 않는다. 그리고 ‘장(長)’이라면 ‘들’과 결합될 때 ‘장’이 음장(音長)을 가지면서 ‘장뜰’이 아닌 ‘장들’로 실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장뜰’을 한자화한 ‘장평’은 ‘장치기를 하던 들’로 이해할 수 있다. 장치기는 보통 민속놀이로 다루는데, 민속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운동 경기이다. 북방(北方) 기마민족(騎馬民族)의 무예(武藝)로, 요(遼)와 금(金)에서 성행하던 격구(擊毬)를 고구려 때 수입하여 변형시킨 것이다. 원래 격구는 걸어서 하는 것과 말을 타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걸어서 하는 것을 타구(打毬) 또는 봉희(棒戱)라 했다. 타구[봉희]는 궁중(宮中)ㆍ상류층(上流層)에서 즐기다가 조선 중엽에 쇠퇴했는데, 그 이후에는 민간에서 장치기라 하여 전했다. 장치기를 할 때에는 단단한 나무로 만든 주먹만한 크기의 공을 사용하는데, 때로는 임시로 새끼나 칡넝쿨을 둥글게 뭉쳐 쓰기도 했다. 장치기는 오늘날 필드하키(field hockey)와 비슷한데, 끝이 굽은 장대로 공을 쳐서 표시한 곳까지 가게 하는 경기이다. 편을 갈라 공격하고 방어하여 금을 넘어가면 한 동이 나는 것이다. 계절 또는 장소에 관계없이 할 수 있는데, 언덕ㆍ고개ㆍ밭ㆍ논ㆍ냇가ㆍ한길에서 행했다. 특히 겨울에는 얼음판ㆍ눈밭에서도 했는데, 긋거나 나무잣대를 누이거나 돌을 한 줄로 놓아 금[線]을 표시했다. 장치기를 할 때에는 주로 내기를 곁들이는데, 겨울에는 나무 내기를 하고 여름에는 풀 내기를 했다. 미리 목적하는 동수를 정해 놓고 이기는 편은 쉬고 지는 편은 나무나 풀을 곱절로 해야 한다(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 1994: 1208).장동리는 교동리ㆍ증천리ㆍ송산리ㆍ미암리와 접해 있고, 증평읍에서 도안면 방면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삼일아파트ㆍ주공4단지아파트ㆍ주공5단지아파트 등 아파트 밀집지역이다. 또한 증평소방서ㆍ한국전력공사 괴산지점ㆍ증평문화원ㆍ증평여성회관ㆍ증평엽연초생산조합ㆍ증평농협 등이 자리하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2,473세대에 7,337명이 거주하고 있다.

  • 장동1리(莊洞一里) : 윗장뜰 : 장동리는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장평(壯坪)’으로 불리던 곳이다. 장동1리는 장동리 중 동북쪽에 있으며, 보창아파트ㆍ제일하이츠빌 외에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장동1리 일대, 특히 ‘신궁전웨딩홀[구 증평읍사무소 자리]’와 현 괴산경찰서증평지구대가 있던 곳을 ‘윗장뜰’이라 했고, 신동1리를 ‘새텃말’ 또는 ‘아랫장뜰’로 불렀다. ‘윗장뜰’은 ‘위’와 ‘장뜰’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으로, ‘위에 있는 장뜰’로 풀이된다. ‘윗장뜰’에 ‘증평천주교회’가 있다.금방앗간(金-) : 현재 ‘그랜드모텔’이 있는 자리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사금(砂金)을 정련(精鍊)하였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 장동2리(莊洞二里) : 장동리 중 동북쪽에 있으며, 천주교주택 외에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 장동3리(莊洞三里) : 장동리 중 동북쪽에 있으며, 삼일아파트단지로 되어 있다.
  • 장동4리(莊洞四里) : 장동리 중 동북쪽에 있으며, 삼일아파트단지로 되어 있다.
  • 장동5리(莊洞五里) : 장동리 중 동북쪽에 있으며, 삼일아파트단지로 되어 있다.
  • 장동6리(莊洞六里) : 장동리 중 동북쪽에 있으며, 주공아파트4단지로 되어 있다.
  • 장동7리(莊洞七里) : 장동리 중 동북쪽에 있으며, 주공아파트5단지로 되어 있다.

[ 민속자료 ]

단군전(檀君殿) : 장뜰두레놀이 : 증평 지역 농민들이 논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던, 고유의 농요(農謠)와 농악(農樂)을 재현한 전통 두레놀이이다. 이 놀이의 소리는 물을 대는 고리질소리ㆍ모찌기소리ㆍ모심기소리ㆍ초듭매기소리ㆍ이듭매기소리ㆍ방아찧기소리ㆍ세듭매기소리 등으로 되어 있고, 가창 방식은 선창(先唱)과 후창(後唱)으로 되어 있다. 2002년 11을 2일에 개최된 제9회 충북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단체부문 우수상 및 개인부문 장려상[정달훈 씨]을 수상하였고, 학계로부터 민속 원형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증평문화원은 이를 체계화하고 학술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2003년 2월 16일에 ‘장뜰두레놀이보존회’를 설립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16일에 제10회 충북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상을, 2004년 10월 5일~7일에 개최된 제45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은상을 수상함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증평군에서는 2004년부터 ‘장뜰두레놀이’를 우리 민속 전통놀이로 활성화하고 영구히 보존하고자 매년 ‘장뜰노래축제’ 행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2005년 8월에 『장뜰두레농요조사보고서』(청주대학교 이창신 교수)도 발표한 바 있다. 2005년에 ‘장뜰두레놀이보존회’(회장 양철주 씨)를 다시 설립하고, 2006년 5월 24일에 증평군 무형 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2010년에는 ??2010 증평등노래축제??로 바꾸어 행사를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