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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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군 산천

증평군 산천

두타산 (頭陀山)

두타산[해발 598.3m]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노령산맥의 한줄기이다. 이 산은 해발 448m,해발 598.3m,해발 551m,해발 520.5m의 산봉우리가 군락을 이루며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신통리와 증평군 도안면 연촌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조선시대 관찬(官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충청도읍지(忠靑道邑誌)』,『호서읍지(湖西邑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두타산재현서이십리우견진천현(頭陀山在縣西二十里又見鎭川縣)” 즉 “두타산은 청안현청(淸安縣廳) 서쪽 20리에 있으며, 진천군과 경계를 이룬다.”는 뜻이다. 두타산에서는 증평평야/진천평야와 충남 조치원에 이르는 미호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산은 금강(錦江)의 발원지 중 하나인 도안면 노암4리 ‘베루재’[고개]에서 발원하는 연암천(硯巖川), 미암4리 ‘대지랭이’에서 발원하는 자양천(紫陽川), 보강산에서 발원하는 부석천(浮石川), 율리의 좌구산에서 발원하는 삼기천(三岐川)과 청안천(淸安川) 등이 합류한 보강천을 끼고 있다.

두타산의 유래는 중국의 최고 지리 서적인 『산해경(山海經)』의 해외동경(海外東經) 편에 의하면 “칠년홍수치산치수단군신팽우(七年洪水治山治水檀君臣彭虞)”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지금으로부터 4,300여 년 전 단군이 나라를 다스릴 때 오랫동안 장마로 물난리를 겪었고, 이 지역도 평해(平海)로 변하니 백성들이 가장 높은 산으로 모여들어 수난을 피했다.”는 뜻이다. 그 대홍수(大洪水) 때 이 산의 산봉우리가 섬같이 보였다고 하여 머리 두(頭), 섬 타(陀)자를 따서 ‘두타산’이라고 부르게 됐으며, 또한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도와준 산이라 하여 일명 ‘가리도(加利島)’라 부르기도 한다. 당시 배가 진천과 증평 쪽을 넘나들던 고개를 연탄2리 ‘배너미고개’[고개]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부르고 있다. 그러나 ‘두타(頭陀)’는 불교용어로, ‘번뇌의 티끌을 떨어 없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일’을 뜻한다. 전국적으로 ‘두타산’이 여러 군데에 있으며, 또 산 이름 중에는 ‘비로봉(毘盧峰)’ 등 불교와 관련된 이름들이 있으니, 본 예도 불교와 관련하여 풀이할 수 있겠다.

두타산 정상에는 석성(石城)으로 된 두타산성이 있는데, 산성의 둘레는 913m,높이는 1.2m,폭은 2.7m로 남문과 동문지(東門址)가 있으며, 남문지(南門址)의 왼쪽에는 적 침투 방위를 목적으로 축성된 두 곳의 토루(土壘)가 있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의 경질 토기 조각과 고구려시대 및 통일신라의 토기조각이 발견된 바 있고, 아직도 두 개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두타산성은 신라 장군 실죽(實竹)이 소지왕 8년(486) 이찬에 임명되어 백제군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실죽 장군은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과 청산의 굴산성(屈山城)을 개축하기도 하고, 동왕 16년(494)에 살수지원(薩水之原) 및 우산성(牛山城)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두타산 정상 부근에는 상취(上娶)의 기(氣)가 있다고 하여 정상 부근과 내려온 줄기의 대봉산을 비롯한 곳곳에 명당을 찾아 쓴 묘(墓)들이 산재해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향두타마상유득(向頭陀馬上有得)’이란 제목으로 두타산을 노래하고 있다.

향두타마상유득(向頭陀馬上有得)
행행로부진(行行路不盡) 만수갱천봉(萬水更千峰)
홀각초제근(忽覺招提近) 임단유모종(林端有暮鐘)
두타산을 향해 가다가
가고 가도 길은 끝이 없고
일만 물줄기에 일천의 산봉우리라
홀연히 가까이에 절이 있음을 알겠으나
숲 저편에서 저녁 종소리 들린다.
(임동철 외, 2002: 18)